강원도 대형산불 주범 ‘양간지풍’ 실체 확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국내 연구진, 국지풍 첫 특별관측

‘마치 불씨가 도깨비처럼 날아다녔다.’

성종 20년(1489년) 2월 24월 강원 양양에서 일어난 불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불씨는 주변 가옥 205채와 낙산사 관음전을 태운 다음 간성(현 고성)까지 번져 향교와 가옥 124채를 태웠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이처럼 2∼4월 강원 영동지역을 집어삼킨 대형 산불에 관한 기사가 12건이나 기록돼 있다.

봄철 이 지역에 불씨를 널리 퍼뜨려 대형 산불로 이어지게 하는 강풍의 정체는 ‘화풍(火風)’이라는 별명을 가진 ‘양간지풍(襄杆之風)’이다. 양양과 간성 사이에 부는 국지적 강풍이라는 뜻으로 두 지역 앞 글자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 국내 기상전문가와 산불 전문가들은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던 이 바람을 처음으로 실측, 분석해 지난달 30일 결과를 공개했다.

○양간지풍 첫 특별관측


기상과학자들은 양간지풍이 불어온 지난해 3, 4월 강원 양양과 고성에서 풍선에 매달아 대기 중 기압과 기온, 바람, 습도를 관측해 지상으로 송신하는 전자 장비인 ‘레이윈존데’를 활용해 특별관측을 했다. 강원지방기상청 제공
기상과학자들은 양간지풍이 불어온 지난해 3, 4월 강원 양양과 고성에서 풍선에 매달아 대기 중 기압과 기온, 바람, 습도를 관측해 지상으로 송신하는 전자 장비인 ‘레이윈존데’를 활용해 특별관측을 했다. 강원지방기상청 제공
강원지방기상청과 국립기상과학원, 강릉원주대, 동해안산불방지센터 등 13개 기관 전문가가 참여한 연구팀은 지난해 3∼5월 강원 인제와 양양, 진부와 대관령, 강릉에 723대의 관측장비를 설치하고 바람의 특성 규명에 나섰다. 국지풍인 양간지풍만 따로 떼어내 분석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봄철 중국에서 한반도로 따뜻한 이동성 고기압이 다가서면 태백산맥 상공에는 역전층이 형성된다. 보통은 고도가 올라가면 기온은 떨어지지만 역전층에선 기온이 올라간다.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은 이 역전층과 산맥 산등성이를 통과하는데 이 과정에서 공기가 압축되면서 공기 흐름이 급격히 빨라진다. 함인화 강원기상청 예보과 주무관은 “공기가 산맥을 넘어 동해안을 만나면 마치 수문을 연 댐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듯 풍속이 급격히 빨라진다”며 “그 결과로 산맥 동쪽 경사면인 영동 지방에 매우 강한 바람이 분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번 관측에서 양간지풍 바람길을 따라 지상부터 대기 상층까지의 3차원(3D) 자료를 얻었다. 이 결과 그간 이론상으로만 설명하던 역전층 높이와 양간지풍의 실체를 확인했다.

연구팀은 양간지풍이 불기 전 동해안 고도 1.2∼2.0km 사이에 형성된 역전층 고도가 지상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아랫부분의 대기가 역전층에 눌려 압축되고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역전층 하층은 지상에 점점 가까워지다가 어느 순간 소멸하고 상층은 위로 상승하는데 이때 아주 강한 바람이 동남쪽으로 부는 것으로 처음 확인됐다. 박유정 강원기상청 주무관은 “첫 관측 자료라 양간지풍의 특성이라고 단언할 순 없지만 역전층의 움직임에 따라 양간지풍이 발생하는 모습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대형 산불 대응 위한 2차 연구 진행


국내에서 일어나는 산불은 주로 건조한 봄철에 집중된다. 산림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일어난 산불은 620건으로, 이 중 355건이 3, 4월에 집중됐다. 유독 강원 영동 지역은 이 시기 강한 바람을 타고 불이 크게 번지는 유형이 반복되고 있다. 소방당국이 해마다 이때가 되면 잔뜩 긴장하는 이유다.

특히 2019년 4월 고성 속초 산불 때 불었던 강풍은 바람의 강도를 표시하기 위해 만든 ‘보퍼트 풍력계급’ 12단계 중 7단계인 ‘센바람’부터 11단계인 ‘왕바람’까지 아우른 것으로 나타났다. 센바람은 나무가 흔들리고 걷기가 힘들 정도이고, 왕바람은 건물이 손상을 입는 수준이다. 작은 불씨가 대규모 산불로 이어진 데는 이런 변화무쌍한 바람이 작용했다.

전문가들은 지금도 양간지풍에 대한 이해가 초보 수준에 머문다고 보고 있다. 바람이 시작하는 발생 조건과 정확한 진행 방향의 유형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박 주무관은 “과거에는 관측 자료가 부족해 수치모델과 특성을 추정하는 쪽으로 주로 연구가 집중됐다”며 “지금도 국지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발달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미 3월 16일부터 2차 관측에 들어갔다. 연구팀은 횡성에서 대관령, 강릉으로 이어지는 바람길을 따라 해마다 관측에 나설 계획이다.

김백조 기상과학원 재해기상연구부 팀장은 “양간지풍의 발생 패턴을 예측해 이를 대형 산불 대응에 활용할 수 있다면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산불 현장 지휘 본부와 산불 진압 소방관들에게 유용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jawon1212@donga.com
#강원도#대형산불#양간지풍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