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가 곧 그림이더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곽인식 김종영 김환기 백남준 등 ‘서예’ 수련한 작가 11명 작품 전시
전통 미학에 새로운 서구예술 접목… 현대미술 선대 작가들 재평가 기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 ‘Neon TV―Love is 10,000miles’(1990년). 화면 위에 ‘愛情萬里(애정만리)’라고 적은 작가의 붓글씨를 볼 수 있다. 나란히 전시된 ‘Neon TV―22nd Century fox’(1990년) 화면 위에도 붉은 물감으로 한자를 써놓았다. 김종영미술관 제공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 ‘Neon TV―Love is 10,000miles’(1990년). 화면 위에 ‘愛情萬里(애정만리)’라고 적은 작가의 붓글씨를 볼 수 있다. 나란히 전시된 ‘Neon TV―22nd Century fox’(1990년) 화면 위에도 붉은 물감으로 한자를 써놓았다. 김종영미술관 제공
김종영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전 ‘화가의 글씨, 서가의 그림’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서예 수련의 성취는 기대보다 더디게 나타난다. 도드라지는 차별성을 재빨리 드러낼 수완을 겨루는 시대에 서예는 그래서 생경한 영역이다. 4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는 개관 20주년 기념전 ‘화가의 글씨, 서가의 그림’은 서(書)와 화(畵)를 별개로 여기지 않던 시대에 태어나고 자라 한국 현대미술 첫 장에 낙관을 남긴 작가 11명의 작품을 아우른 전시다.

밝을 명(明)자 쓰기를 연습하는 행위가 추구하는 목표는 빛을 품은 듯한 획을 빚는 것일지 모른다. 해와 달의 모습을 본떠 합친 글자인 까닭이다. 지하 1층 제1전시실에 걸린 곽인식(1919∼1988)의 ‘명, 원’(1986년)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한번에 이렇게 쓰기까지 몇 번 같은 획을 그었을까’ 궁금해진다.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한 곽인식은 전통 회화보다는 유리조각과 철판 등을 이용한 조형 작업으로 이름을 알린 작가다. 그는 생전에 “네 살 때 글씨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림을 좋아하게 됐다. 강변에 붓을 들고 나가 평평한 돌에 글씨를 쓰고 대나무를 그렸다. 강물에 지운 뒤 햇빛에 돌을 말려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신문지 위에 유채로 그린 김환기의 1967년 작 ‘무제’(왼쪽 사진)와 최규명의 ‘고려’(연도 미상). ⓒ환기재단·환기미술관,우석뮤지엄 제공
신문지 위에 유채로 그린 김환기의 1967년 작 ‘무제’(왼쪽 사진)와 최규명의 ‘고려’(연도 미상). ⓒ환기재단·환기미술관,우석뮤지엄 제공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은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익혀 평생 추구한 조형적 가치관의 근간으로 삼았다. 김정희의 글씨를 사랑했던 그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투철한 조형성을 바탕으로 일반의 통념을 뛰어넘은 높은 경지에서 자획을 해체해 재구성했다”며 폴 세잔의 큐비즘 회화에 추사의 글씨를 비견했다. 김종영은 젊은 시절 치밀한 사실성을 추구하는 구상 작품을 선보이다가 50대부터 서예의 조형성을 반영한 추상 조각 작업에 몰두했다.

박춘호 학예실장은 “이번에 회고하는 작가들은 스타일의 확립과 과시에 연연하지 않고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전통 미학을 새로 받아들인 서구 예술에 접목해 함께 확장시킬 방도를 차분하게 고민했던 이들”이라며 “기본기를 치열하게 가다듬는 노력이 결국 온전한 자유로움에 이르는 길임을 작품을 통해 실증적으로 알려준다”고 말했다.

3전시실의 김환기(1913∼1974)와 백남준(1932∼2006)은 서예 수련에 본격적으로 정진하지는 않았던 작가들이다. 하지만 백남준의 프린트 작품 ‘心’(연도 미상)과 비디오아트 ‘Neon TV’(1990년) 연작은 그가 지녔던 필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김환기의 1967년작 무제 세 점 역시 사물의 구성 요소를 분석해서 재구성하는 추상 회화의 원리가 서예의 근본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추상화가 한묵(1914∼2016)의 서예 작품 네 점도 마찬가지다.

서예와 문인화에 뿌리를 두고 자신만의 추상화 세계를 구축한 이응노(1904∼1989), 동양화에 서구 미술 기법을 가미했던 황창배(1947∼2001), 서예의 회화성에 천착했던 최규명(1919∼1999) 등의 작품이 이어진다.

박 실장은 “10여 년 전부터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단색화를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이제는 이런 흐름에 대한 비판적 논의도 필요하다”며 “우리 고유의 서화와 서구의 미술을 대등한 재료로 인식했던 선대 작가들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보다 폭넓은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글씨#그림#전시#서예#작품 전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