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석탑에 웬 말 그림? 110년 떠돈 국보의 ‘기구한 상처’

김상운 기자 입력 2021-01-21 03:00수정 2021-01-2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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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반출됐던 고려 지광국사탑 상층 기단석서 붉은색 말 그림 발견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 수리를 마친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왼쪽 사진). 이 탑의 석재를 들어올리자 상층 기단석 윗부분에서 붉은색 ‘말 그림‘(오른쪽 사진)이 발견됐다. 입을 벌린 말이 앞뒤로 다리를 뻗고 달리는 모습이다. 그림을 육안으로 쉽게 볼 수 있도록 원본 사진의 색상을 보정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보 제101호인 고려시대 석탑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기단석에서 붉은색 말 그림이 발견됐다. 국내 석탑에선 전례가 없는 그림으로, 일본인에 의해 장례 목적으로 훼손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일제강점기에 본래 자리에서 뜯겨져 110년을 떠돈 지광국사탑에 근현대사의 비극이 새겨진 셈이다.

20일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진행된 지광국사탑 해체 수리 과정에서 상층 기단석(탑 몸체를 받치는 아랫돌) 위에 붉은색으로 그려진 말 한 마리가 발견됐다. 그림은 가로세로 각 1.2m인 정사각형 기단석 윗부분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붉은색은 성분 분석 결과 동아시아 전통 회화에서 주로 쓰인 천연 안료 ‘석간주’로 확인됐다.

지광국사탑은 고려시대 국사(國師) 해린(984∼1070)의 사리를 모신 승탑으로, 용이 승천하는 화려한 조각이 눈길을 사로잡는 걸작이다. 아름다운 외관 때문에 1911년 강원 원주시 법천사 터에서 철거돼 이듬해 일본으로 반출되는 등 9번이나 해체 이전되는 비운을 겪었다.

말 그림을 정밀 조사한 전문가들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탑을 불법 반출한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 남작이 그해 사망한 부친 후지타 덴자부로(藤田傳三郞·1843∼1912)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탑에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일본 전통 장례 문화인 ‘에마 풍습’을 따랐다는 것이다. 에마 풍습은 소원을 빌기 위해 말을 신사나 절에 바치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 나무판 등에 말 그림을 그려 신사나 절에 두는 장례 문화다. 연구소 관계자는 “해당 말 그림은 석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데다 전례도 없다”며 “덴자부로가 생전 기병대에서 복무한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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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자부로는 일본 메이지시대 실업가로, 비철금속 분야 대기업인 도와홀딩스의 창립자다. 덴자부로는 생전 골동품 수집에 열중해 불상, 불화, 공예품 등 약 2000건의 문화재를 수집해 오사카 시내에 후지타미술관을 세웠다. 그와 그의 아들이 모은 문화재 중에는 불법 반출된 지광국사탑도 한때 포함돼 있었다.

지광국사탑의 수난사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탑은 1911년 일본 골동품상 모리 무리타에 의해 원주 법천사 터에서 해체 반출된 뒤 서울 명동의 무라카미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어 1912년 사업가 와다 쓰네이치에게 팔려 그의 저택 정원에서 관상용으로 쓰였다. 그러다 헤이타로에게 다시 팔려 그해 여름 일본 오사카로 반출됐다. 중요 문화재의 불법 반출을 뒤늦게 파악한 조선총독부가 환수 결정을 내려 1912년 12월 경복궁 내 임시보관소로 이전됐다. 이후 조선총독부가 1915년 9, 10월 조선 병합 5주년을 맞아 정책 홍보를 위해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에선 야외 장식품으로 전시됐다. 석탑은 이듬해 조선총독부 박물관 소장품으로 지정돼 경복궁 내 근정문 근처로 다시 옮겨졌다.

지광국사탑은 광복 이후 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폭격을 맞아 탑이 1만여 개 조각으로 산산조각 났다. 이후 1957년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급하게 ‘시멘트 땜질’이 이뤄졌다. 지광국사탑은 2015년 정밀안전진단 결과 옥개석(屋蓋石·지붕돌) 등 곳곳에서 균열이 확인돼 2016년부터 전면 해체 수리에 들어갔다. 수리를 마친 연구소는 강원 원주시 법천사 터로 탑의 이전 복원을 추진 중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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