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인사 소식 통보하는 법[광화문에서/김현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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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산업1부 차장
김현수 산업1부 차장
“가장 괴롭고 어려운 날이다.”

인사 시즌, 어떻게 임원들에게 ‘퇴임’을 통보하는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물으니 이 같은 답이 돌아왔다. 가족도 챙기지 못한 채 회사를 위해 수십 년 달려온 임원들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것은 CEO에게도 고역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를 갖추기 위해 다른 시간을 빼서라도 직접 얼굴을 보고 ‘수고했다’고 전하려 한다. 지방 공장에 통보 대상이 있으면 그곳으로 찾아갔다”며 “‘내가 왜요?’라며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날 알아주시지 않았나. 함께 일해서 행복했다’는 답이 오면 나도 뭉클하다”고 했다.

삼성, SK, LG, 롯데 등 주요 기업의 인사 시즌이 파도처럼 왔다 갔다. 올해에도 세대교체가 화두였다. SK에선 1974년생 CEO가 나왔고, LG에선 1983년생 여성 임원이 나왔다. LG전자 임원 승진자 중 70%가 1970년대 이후 출생한 이들이었다. 동시에 신규 임원 수가 대폭 줄어든 곳이 적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변화와 비용 절감 미션을 둘 다 이뤄야 하는 기업들의 고민이 느껴졌다.

세상은 파격 인사의 주인공에 주목하지만 그 뒤에는 쓸쓸히 짐을 싸는 이들이 있다. 퇴임자들은 신문 인사란에 한 줄 반영되지도 않는다. 5대 그룹의 한 임원은 “임원 평가에서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이는 한 명도 없다. 그 자리까지 왔으면 모두 능력이 있고, 최선을 다한 것도 맞다”며 “밀려난다는 것은 충격적인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유통기업 임원은 “찬바람 불 때부터 좌불안석이었다. 코로나 사태 속에 이직할 곳도 별로 없어 어떻게 살아남을지 다들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퇴임까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반 직원들도 인사 시즌엔 뒤숭숭하다. 승진이 안 되거나 원치 않는 자리로 이동하기에 그렇다. ‘열심히 했는데,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까.’ ‘나이 먹은 게 죄인가.’ 한 직원은 “회사는 나에게 무엇인지, 나는 회사에 어떤 존재인지 되묻게 되는 시기”라고 했다.

디즈니의 부활을 주도한 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 회장도 “직원을 해고하거나 맡고 있는 업무를 빼앗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가 쓴 책 ‘디즈니만이 하는 것’에 따르면 그의 인사 통보 원칙은 솔직함이다.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정확하게 전해야 당사자도 자신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다음 행보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도 저성과자를 걸러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이거 회장은 “디즈니스튜디오 회장에 앨런 혼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전임자를 해고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조 원 이상 흥행 수익을 기록한 디즈니 영화 중 70% 이상이 2012년 부임한 혼 회장의 지휘 아래 나왔다.

15년간 디즈니를 이끈 아이거 회장도 올 초 후배에게 자리를 내줬다. 넷플릭스에 대항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인 디즈니플러스를 키워야 하는 대전환기에 더 적합한 CEO에게 말이다.

변화의 파도 앞에선 어떤 영웅도 거슬러 가기 힘들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잘린 적도 있다. 다만 오늘의 한 발이 세상의 끝은 아니다. 힘든 한 발을 내디딜 때 닫힌 문이 열리기도 한다. 새해가 곧 온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인사 시즌#퇴임 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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