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조선 처녀도, 평양 기생도 일본 도쿄로…무슨 일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5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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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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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2월 말일 남대문역, 지금의 서울역에 처녀 7명이 모였습니다. 이중 4명은 14, 15세였으니까 처녀라기보다는 소녀였죠. 제일 나이 많은 처녀가 25세였습니다. 이들은 부모형제와 헤어져야 했지만 얼굴에는 웃음을 머금었죠. 남대문역을 출발한 지 3일 뒤 일본 도쿄(東京)의 도엔지(東淵寺)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이로부터 2주가량 지난 3월 12일, 이번에는 대정권번 기생 12명이 남대문역에 들어섰습니다. 이 권번에는 평양 기생들이 많았습니다. 함흥 기생은 제갈량의 출사표를 잘 외우고 의주 기생은 말을 잘 타고 평양 기생은 관산융마(關山戎馬)를 잘 불렀다죠. 관상융마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에 곡을 붙인 창이랍니다.

꽃다운 처녀들과 내로라하는 기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쿄로 간 이유는 ‘평화기념 도쿄박람회’ 때문이었습니다. 3월 10일부터 7월 말까지 열린 평화박람회는 일본의 국력과 문화를 자랑하려는 목적이었죠. 당시 일본은 세계 5대 강국의 하나였고 워싱턴군축회의에서도 대접을 받았습니다. 국제연맹이 출범하고 군축회의도 타결된 점을 박람회 개최의 계기로 삼았죠. 조선 처녀들은 안내 도우미로, 대정권번 기생들은 공연단으로 활동했습니다.

(위) 평화기념 도쿄박람회에 설치된 조선관에서 안내 역할을 하기 위해 선발된 조선 처녀 7명이 1922년 2월 28일 남대문역을 출발하기에 앞서 사진을 찍었다. 제일 나이 많은 처녀가 25세, 제일 나이 어린 소녀는 14세였으며 6개월 간 도우미를 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아래) 3월 12일에는 평화박람회에 가는 대정권번의 정예 기생 12명 중 10명이 남대문역을 떠나기 전 카메라 앞에 섰다. 이들은 평화박람회 무대에서 5일간 '봉래의' '고구려무' 등 10개 조선 전통춤을 공연한 뒤 극장 유라쿠자(有樂座)에서도 역시 5일간 공연할 예정이었다. 출처=매일신보
(위) 평화기념 도쿄박람회에 설치된 조선관에서 안내 역할을 하기 위해 선발된 조선 처녀 7명이 1922년 2월 28일 남대문역을 출발하기에 앞서 사진을 찍었다. 제일 나이 많은 처녀가 25세, 제일 나이 어린 소녀는 14세였으며 6개월 간 도우미를 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아래) 3월 12일에는 평화박람회에 가는 대정권번의 정예 기생 12명 중 10명이 남대문역을 떠나기 전 카메라 앞에 섰다. 이들은 평화박람회 무대에서 5일간 '봉래의' '고구려무' 등 10개 조선 전통춤을 공연한 뒤 극장 유라쿠자(有樂座)에서도 역시 5일간 공연할 예정이었다. 출처=매일신보


일제는 평화박람회 성공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식민지는 물론 위임통치지역과 조차지역에서도 전시물을 받아왔죠. 1877년에 이미 첫 박람회를 열었던 만큼 운영 요령도 충분했습니다. 조선총독부 역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죠. 총독부는 ‘평화박람회 조선협찬회’를 조직하고 현재의 10억 원 정도를 모금하는 등 흥행몰이에 나섰습니다. 동원하다시피 한 결과 조선에서만 무려 5200명 가까운 인원이 222개 관람단으로 나뉘어 다녀왔죠.

그런데 한창 박람회가 진행되던 5월 4일 느닷없이 동아일보 3면에 ‘저주하라! 평화박람회’ 제목의 머리기사가 실렸습니다. ‘동포여! 관광을 단연 중지하라’는 구호도 중간 제목으로 들어있었죠. 일제와 총독부가 보기에는 자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개최한 평화박람회가 망하라고 재를 뿌린 짓이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기사는 먼저 도쿄 우에노(上野)공원 박람회장에 세운 10개의 특설관 중 조선관을 문제 삼았죠. 임금이 생활하는 전각을 본뜬 2층짜리 조선관은 1322㎡가 넘어 특설관 중 두 번째로 컸죠. 그런데 한마디로 날림이었습니다. 기둥은 속이 보이게 얇은 소나무 조각을 둘러 허술하기 짝이 없었죠. 그래서 2층에는 일반관람객 입장을 막았고 초대권 관람자도 10명 이상 올라가면 조마조마했답니다. 벽에 붙인 단청무늬 종이는 덜렁덜렁했고 기와는 양철조각을 우그려 붙였으며 여염집 부엌에나 붙이는 민화로 장식했다니 말 다했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22년 3월 27일 평화박물관의 조선관을 찾은 히로히토 섭정궁을 조선인 여자 간수들이 봉영, 즉 받들어 영접했다는 사진 기사를 4월 2일자 3면에 실었다. 앞서 언급한 조선 처녀 7명이 간수, 즉 도우미 역할을 한 것이다. 사진 속 한복을 차려입은 조선 처녀들이 무척 앳되어 보인다. 출처=매일신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22년 3월 27일 평화박물관의 조선관을 찾은 히로히토 섭정궁을 조선인 여자 간수들이 봉영, 즉 받들어 영접했다는 사진 기사를 4월 2일자 3면에 실었다. 앞서 언급한 조선 처녀 7명이 간수, 즉 도우미 역할을 한 것이다. 사진 속 한복을 차려입은 조선 처녀들이 무척 앳되어 보인다. 출처=매일신보


조선 전시품은 수수비나 바구니 정도였고 쌀은 왜 그리 많이 벌여놓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가장 큰 불만은 조선인 관람객들이었습니다. 끌려오다시피 한 조선인들이 거의 매일 수백 명씩 돌아다니는데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죠. 흰색 한복 한 벌로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는 일본 곳곳을 20일 넘게 돌아다니면 나중에는 거지꼴이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래서 도쿄에서는 ‘조선단체’라는 말이 몹시 지저분하고 더럽다는 뜻으로 쓰였다죠.

이 기사는 도쿄유학생들의 제보를 종합한 듯합니다. 조선인 관람객들의 모양이 참혹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지경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총독부는 일본의 앞선 문물을 보여줘 관람객들을 하위 협력자로 만들 심산이었겠죠. 쌀은 총독부가 품종 개량한 신제품을 선보여 일본에 많이 팔려는 의도였을 테고요. 하지만 유학생들 눈에는 이것이 조선인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비쳤습니다. 이 울분은 그대로 지면에 반영됐죠. 물론 총독부는 봐주지 않고 기사를 압수 조치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지면은 압수되기 전에 이미 배포돼 살아남은 것이겠죠.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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