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창이기(一槍二旗)’ 어린 싹, 새 봄을 마시다[전승훈 기자의 내 삶을 바꾼 예술]

장성=전승훈 기자 입력 2020-05-14 14:00수정 2020-05-1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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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특파원을 하던 2015년 가을이었다. 지인이 휴일에 부르고뉴 지역의 포도밭에 포도를 따러가자고 했다. 아이와 함께 가서 가위를 들고 잘 익은 포도를 한송이 한송이씩 땄다. 우리가 딴 포도는 수레에 가득 실렸다. 와이너리로 가져온 포도는 줄기와 껍질까지 혼합해 기계로 들어가 포도즙이 됐다. 함께 포도를 땄던 부르고뉴 시골 농부들과 함께 먹었던 바게트와 햄, 치즈로 된 소박한 점심도 맛있었다.

그날 지하 창고에서 숙성된 와인을 몇 병 사가지고 왔다. 몇 달이 지난 후에 그 와인을 마셔보니 포도를 따던 가을날의 흙냄새, 바람, 흰구름, 수레의 모습이 머릿 속에서 그림처럼 펼쳐졌다. 내가 직접 따고, 즙을 짰던 와인이라 마치 오래된 아는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지난 주 6,7일 전남 장성의 야생차밭에 가서 찻잎을 직접 따고, 제다(製茶)까지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프랑스에서 포도밭에서 포도를 직접 따서 와인을 담궈봤을 때 와인을 더 깊이 느껴봤던 추억이 있던지라, 이번에도 뭔가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산 속에서 찻잎따고, 달밤에 차를 덖다


차밭에 간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사진 속에서만 봐왔던 전남 보성의 녹차밭을 상상했다. 산허리에 계단식으로 펼쳐진 푸른 녹차밭, 그 속에서 군데군데 찻잎을 따는 아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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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실제로 가본 전남 장성군 삼계면 죽림리의 차밭은 깊은 산 속에 있었다. 무덤과 대나무 숲 속에 빽빽하게 자란 차밭에는 길도 없었다. 얼키고 설킨 나뭇가지를 헤쳐가며 차나무 가지 끝에 새롭게 피어난 연초록색 새 잎을 하나하나 손으로 땄다.

일창이기(一槍二旗)!

차 나무 끝에 새롭게 돋아난 세 개의 잎이 오늘 따야할 찻잎이다. 하나는 채 피지 않은 어린싹(한개의 창)이고, 두 장은 약간 벌어진 어린 잎(두개의 깃발)이다. 참새의 혀처럼 생긴 새순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작설(雀舌)’, 또는 ‘세작(細雀)’ 차의 재료다. 햇볕이 따가웠지만, 채반에 쌓여가는 초록색 찻잎의 색깔이 너무나 고와서 멈출 수가 없었다. 약 두어 시간 동안 찻잎을 따는 작업 끝에 허리춤에 찬 앞치마에 찻잎이 수북하게 쌓였다.

이 차밭은 김형규 도예가(53)가 운영하는 ‘희뫼요’ 인근에 있는 야산에 자연스럽게 형성돼 있는 야생차밭이었다. 김 도예가는 “이곳 부근에 천방사지라는 절터가 있었는데 약 500~600년 전 고려말~조선초기에 스님들이 마시려고 차를 심었고, 이후에도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에도 꾸준히 번식돼 전해져 내려오는 오래된 차나무”라고 소개했다.

이날 체험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김태훈·KCDF)이 주최하는 ‘공예주간’(Korea Craft Week)의 사전행사로 열린 ‘다함께 차차茶’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행사는 도자기, 금속공예, 가죽공예, 옻칠, 섬유공예 등 전국에서 다양한 작업을 하는 젊은 공예가와 요리사, 찻집 운영자, 요가 강사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채엽(찻잎 따기)을 마친 이들이 산에서 내려와 찻잎을 쏟아놓자 커다란 돗자리에 하나가득 찼다. 한 두시간 동안 그늘에서 차를 말리자 찻잎에서는 톡쏘는 풀냄새가 사라지고, 꽃향기처럼 향긋한 냄새가 온 몸을 감쌌다.

“찻잎은 누가 따도 손으로 하나하나 따야 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귀한 것입니다. 그늘에서 한동안 두는 이유는, 찻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올 때의 상처와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발효되고 숙성된 차를 솥에서 덖어서 차를 만듭니다. 밤새 덖고, 비벼서 차를 다 만들고 나면 양이 10분의 1로 줄어들게 됩니다.”


희뫼 김형규 도예가와 젊은 공예인들은 오후 늦게부터 본격적으로 솥에 차를 덖는 작업을 시작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덖다’는 ‘습기가 약간 있는 약재나 곡식 등을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히는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선 불에 바짝 달궈진 커다란 무쇠 솥에 찻잎을 넣고 손으로 천천히 휘젓는다. 덖어진 찻잎은 채반에 담아 옆방으로 옮겨져 손으로 빨래를 빨듯이 강한 압력으로 주무르고, 비비는 ‘유념(揉捻)’ 과정을 거친다. 온 몸에 체중을 실어 차를 비틀어 주무르는 유념은 손과 무릎이 아플 정도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또다시 덖고, 유념하고, 덖고, 유념하고…. 이 과정이 10여 차례 반복되는 동안 봄밤의 뒷산 위로 휘영청 슈퍼문이 떠올랐다. 어느새 찻잎은 꼬들꼬들 비틀어진 모습으로 짙은 녹색으로 변했다.

마지막 순서로 김형규 도예가는 홀로 2시간 동안 미지근하게 달궈진 무쇠솥에서 천천히 ‘가향’ 작업을 했다. 차는 솥에서 살짝 그을리며 향이 더욱 살아났다. 마침내 제다 작업이 끝난 것은 새벽 4시. 그토록 밝던 보름달도 서산에 기울어갔다.

차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 옻칠공예가 유남권 씨(34)는 “수제(手製)차를 만드는 과정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며 “땀흘려 힘들게 딴 찻잎이 덖는 과정을 거치면서 양이 10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차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새벽까지 제다 작업을 함께 한 금속공예가 이윤정 씨(34)는 “수제차를 만들어보니 불가마 속에 도자기를 굽고, 주물에 금속을 녹여부어 만드는 공예품을 만드는 과정하고 비슷하다고 느꼈다”며 “사람의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마지막 결과물은 불이나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에 맡겨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닮았다”고 말했다.


차도, 도자기도 물과 불, 흙의 조화로 태어난다

다음날 아침. 희뫼요 별채 앞마당에서 차회(茶會)가 열렸다. 어젯밤 참가자들이 직접 만든 작설차에 따뜻한 물을 따랐다. 네 번이나 우렸는데도 차의 은은한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역시 수백번 손길이 간 수제차(手製茶)는 달랐다. ‘아, 봄을 마신다는 표현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산 속에서 겨우내 잠들다 깨어난 야생차나무의 어린 잎에서 나오는 봄의 향기, 숲 속의 냄새가 온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수제차를 끝까지 마셔본 기억이 없었다. 한 두번 우려 먹고는 몇 년동안 먹지 않아 휴지통으로 가기 일쑤였다. 차를 만드는데 이렇게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는 것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텐데….

최성우 보안여관1942 대표는 “생산이 담보되지 않는 문화는 한계가 있다”며 “차를 직접 만들어보면 비로소 깊은 차맛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의 차문화를 이끌어갈 30대 젊은 공예인들에게 전통 차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직접 차를 따고, 만들어보는 체험을 하는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날 차회에서는 ‘티 어벤저스’라는 별명을 가진 30대 젊은 공예가 6인이 만든 다구 세트가 활용됐다. 안성에서 다기를 만드는 부부도예가인 ‘토림도예’의 신정현 김유미 씨가 만든 찻잔은 날아갈 듯 세련된 멋이 있었다. 흙으로 빚은 잔이 얼마나 가볍고 날렵한지 차를 끓이는 마당에 바람이 휭하니 불자 잔이 살짝 흔들릴 정도였다.

티 테이블에는 은색으로 반짝이는 차 받침대가 눈에 띄었다. 금속공예가 이윤정 씨가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트레이었다. 차를 덜어낼 때, 긁어낼 때, 다과를 꼽을 때 사용한 황동으로 만든 수저와 침도 세련된 모습으로 반짝였다. 가죽공예가 김준수 씨는 가죽을 수백번 망치질해서 무늬를 만들어낸 차 받침대와 다식접시, 차를 담는 통을 선보였다.

그런가하면 섬유공예가 이지원 씨는 다관세트를 휴대용으로 넣고 다닐 수 있는 주머니를 만들었다. 30대 남성이 목화에서 직접 면실을 뽑고, 실크실과 합쳐서 직접 직조하고, 바느질까지 해서 만든 주머니었다. ‘옻칠공예의 BTS’로 불리는 유남권 씨는 한지종이에 옻칠을 해서 만든 ‘지태칠기(紙胎漆器)’ 함을 선보였다. 그는 “금속에 옻칠을 하면 금태칠기, 도자기에 옻칠을 하면 도태칠기, 종이에 옻칠을 하면 지태칠기라고 한다”며 “종이로 만든 옻칠 그릇은 가벼우면서도 물에 강하기 때문에 장거리 이동할 때 다구, 갓, 지필묵 등을 담는 함으로 많이 쓰였다”고 소개했다.

5060세대가 즐기던 차의 이미지가 요즘엔 크게 달라지고 있다. 커피에 빠진 밀레니얼 세대들은 요즘 쿨한 분위기의 찻집과 디저트 카페에서 발효차, 과일차, 블렌디드 차 등 다양한 맛의 차를 즐긴다. 스타벅스, 공차 등 유명 브랜드 뿐 아니라, 서울 종로구 서촌의 ‘옥인다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티컬렉티브’처럼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춘 토종브랜드의 찻집에서도 젊은 층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경주 ‘백암요’ 대표인 박승일 도예가는 “예전에는 차를 도(道)의 개념으로 배웠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차도 그냥 음료처럼 즐긴다”며 “인테리어가 신선한 찻집에서 예쁜 그릇과 소품을 찍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인증샷을 올리는 2030세대가 새로운 한국 차 문화를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매년 봄에 열던 ‘공예주간’은 코로나 19의 여파로 가을(9월18~27일)로 연기됐다. 대신 ‘봄날에 즐기는 일상 속 공예문화 축제’의 취지를 잇기 위해 5월부터 8월까지 각 지역에서 다양한 사전행사가 열린다. 전남 장성 희뫼요에서 열린 ‘다함께 차차차’ 행사에서 선보인 다구는 12~22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BOAN1942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도 감상할 수가 있다. ‘티 어벤저스’의 작품 뿐 아니라 백암요, 희뫼요, 노산도방, 무소공방이 만든 다관(茶罐·작은 주전자 모양의 도자기)과 잔, 숙우(熟盂·끓인 물을 식히는 대접) 등도 만나볼 수 있다.

보안여관에 가보니 전시장 입구에 이런 글이 걸려 있었다.

“차(茶)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깝다. 차(茶)는 물, 불, 흙의 세계가 함께 움직여 몸 속으로 들어온다. 차(茶)는 물에 의해 색과 향을 드러낸다. 동의보감에는 33가지의 물이 있고 바슐라르는 대지의 근원이 물이라 했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불을 피워 차를 덖고 물을 끓이고, 흙으로 만든 그릇에 차를 우려내어야 한다. 그릇 없이는 차를 끓이거나 마실 수 없다. 술이나 물은 손으로 퍼담을 수 있지만 차(茶)는 그러지 못한다. 찻잎을 함께 따고 찻잎의 푸른 기운을 오랫동안 살려낼 수 있는 차도구들을 모으고 차를 제대로 우려내는 행위들을 모으는 것이다.” (BOAN1942 대표 최성우)

장성=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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