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문화

여성, 노인, 고교생도 선두에서 부정선거-독재에 맞섰다

입력 2020-04-18 03:00업데이트 2020-04-18 03:00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4·19혁명 60주년… 대학생인 ‘젊은 사자들’만 주역?
4·19혁명은 대학생과 교수 등의 엘리트층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계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남 마산제일여고 학생들이 1960년 4월 12일 ‘공명선거 다시 하자’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연세대 박물관 제공
성명 문체용. 1960년 당시 35세 남성. 주소 경남 마산시 상남동. 이름은 자료상 한글과 한자가 일치하지 않고, ‘문○영(文○英)’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중성동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왼쪽 다리가 골절됐다. 학력란은 비어 있다. 부친의 직업은 농업, 경제 상태는 하(下). 장래 희망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고, 경남도립마산병원에 입원한 심정은 “앞길을 생각할 때 한없이 슬프다”고 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되찾아 뿌듯하다’처럼 시위 참여 동기나 정국 전망 관련 답변을 한 학생들의 답과 차이가 있다.

문 씨는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수집자료(4·19혁명 참여자 구술 조사서)’ 가운데 ‘부상자 실태조사서’에 등장한다. 이 자료는 1960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이던 김달중 안병준 씨(나중에 연세대 교수를 지냄)가 그해 4월 23일경부터 7월까지 당사자들을 면담해 작성한 것이다. 자료 소장처인 연세대 박물관의 이원규 학예팀 아키비스트(기록연구사)는 “당대 생산돼 시간의 경과에 따른 왜곡이 적은 1차 자료”라고 설명했다.

문 씨의 프로필은 흔히 떠올리는 4·19혁명 주역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가 그저 시위에 휩쓸렸던 것도 아니다. 그는 데모할 때 ‘부정선거 다시 하라’ ‘무장경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을 뿐 아니라 (경찰서 등을) ‘부수지 말자’는 주장을 했다고 분명히 언급했다.

부정선거와 독재에 맞서 피로 민주주의를 지킨 4·19혁명이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문 씨처럼 혁명의 주역임에도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간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봤다.

연구자들은 4·19혁명은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했음에도 학생, 그중에서도 특히 대학생과 교수를 비롯한 엘리트 중심으로 조명된 경향이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식자층이 혁명의 한 주역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일기나 수기 등 사료가 될 수 있는 기록을 일상적으로 남겼기에 그들이 기억되기가 더 쉬웠다는 얘기다.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자료에는 파출소에 방화했다는 누명을 씌우려는 경찰의 고문을 받은 박세현 씨(당시 22세)의 조사서도 포함돼 있다. 그의 직업은 ‘운전수’. 자료를 보면 박 씨는 다친 몸으로 6, 7명의 식구를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에 근심이 가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본인의 불구 된 것은 아깝지 않으나, 제2공화국을 바로잡으며 올바른 민주주의 역사가 길이길이 영원토록 나가도록 비나이다”라고 밝혔다.

1960년 4월 25일 마산시청 앞에서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는 할머니들. 연세대 박물관 제공
노인 시위대 역시 거의 잊힌 혁명의 주역들이다. 당시 사진에는 1960년 4월 25일 할머니 시위대가 마산시청 앞에서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라고 쓴 플래카드와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 생생하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저서 ‘민주주의 잔혹사’에서 “이승만 하야(4월 26일) 전 플래카드와 구호로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퇴진을 요구하는 건 보통의 용기와 결단이 아니었다”며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벌인 시위는 시민들이 합세해 수만 명이 모인 대규모로 번졌지만 관련 책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4·19혁명의 주체를 오랫동안 ‘젊은 사자들’로 표현한 것 역시 문제였다는 분석이다. ‘젊은 사자들’은 1958년 개봉해 인기를 모은 영화 제목으로, 혁명 직후 각종 간행물에서 주로 대학생들을 호명하는 관용구가 됐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수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 표상은 혁명의 주체였던 여학생과 주부, 빈민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여고생들도 학도호국단 간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학교별로 조직적인 시위에 나섰다. 4·19혁명의 서막을 연 2·28 대구 의거 당시에도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들이 궐기했으며, 3·15 부정선거 뒤에도 진해여고(진해) 데레사여고(부산) 성지여고 마산여고 마산제일여고(마산) 청주여고(청주)를 비롯해 수많은 여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여대생들도 다수 시위에 참여했다. 오 교수는 “남자 대학생 중심의 4·19혁명 상(像)은 여성의 역할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또 고려대생이 4·18 시위를 벌이기 전 4·19혁명의 초기 주인공은 고교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교생들은 그해 2월 말부터 계획적인 시위를 지속해서 벌였으며, 혁명이 절정에 이른 순간에도 일선에서 피를 흘렸다. 4·19 당시 서울 동성고 3학년으로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왼팔에 총을 맞은 강대기 씨는 “우리들은 자유 민주 정의를 위해 피를 흘렸다. 어떤 반대급부도 요구하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선 것뿐이었다”(‘동성의 4·19혁명’에서)고 회고했다. 서울 경신고 2학년이던 권무웅 씨(작고)는 19일 밤 시위대와 차를 타고 경기 의정부로 가던 도중 창동에서 복부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그는 병원에서 “이제 우리가 학생으로서 원하던 것은 다 성취된 셈”이라고 했다(연세대 4월혁명조사반 자료).

4·19혁명은 증언할 수 있는 당사자들이 있는 만큼 진상을 폭넓게 조명하려는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몇몇이 학교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왜곡된 기록을 정정한 특정 학교의 4·19혁명 백서가 최근에 새로 나오기도 했다. ‘가짜 유공자’ ‘가짜 부상자’ 논란 역시 말끔히 정리됐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연세대 박물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잦아드는 대로 서울 서대문구 박물관에서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수집자료’ 등을 소개하는 전시 ‘청년학생의 힘―정의의 깃발, 자유의 함성, 민주의 길’의 문을 열 예정이다.

▼“어머니! 국가 위해 우리 아니면 누가 데모 하겠어요” 유서가 된 소녀의 편지▼ 

4·19민주묘지 ‘민주열사들을 만나다’ 발간… 다시 새기는 숭고한 정신

“어머니,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서울 한성여중 2학년으로 ‘청소 시간에 땀방울을 줄줄 흘리며 마루를 닦던, 협동심이 강하고 적극적이었던’ 14세 소녀. 의사나 법조인이 돼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꿈이었던, 1남 2녀 가운데 막내. 진영숙. 그는 1960년 4월 19일 시위대와 함께 버스를 타고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다가 안타깝게도 서울 미아리고개에서 경찰의 총탄에 스러졌다. 그날 어머니에게 미처 고하지 못하고 집을 나서며 재봉틀 서랍에 넣어둔 편지는 끝내 유서가 됐다.

국립4·19민주묘지(소장 방형남)는 4·19혁명 열사들을 조명한 ‘4·19혁명 60주년, 민주열사들을 만나다’(사진)를 19일 발간한다. 민주묘지에 묻힌 혁명 참가자들의 생전 글과 유족들의 회고, 자료와 증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책은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그대로 전한다. 서울대 문리대생이던 김치호 열사(1939∼1960)는 4월 19일 경무대(청와대)로 진격하다가 경찰의 무차별 사격에 쓰러져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됐다. 총탄 3발이 복부를 관통한 중상이었음에도 고교생들을 먼저 치료해달라며 자신의 치료를 미루다가 다음 날 새벽 운명했다. 중앙대 법학과 2학년이던 서현무 열사(1938∼1960)는 4월 19일 시위에 나섰다가 붙잡힌 뒤 경찰의 고문과 구타로 몸을 상해 고통을 겪다가 7월 2일 숨을 거뒀다. “병원에서도 그는 더 심하게 부상한 환자들을 위하여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동아일보 1960년 7월 3일 기사)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 역시 절절히 드러나 있다. 김창필 열사(1934∼1960)는 당시 민주당 서울시당 선전반원으로 시위의 최일선에서 맹렬히 활약했다. 아버지 김흥돈 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아들은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심장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생을 마쳤다. 동아일보 취재 지프차는 창필의 시신을 싣고 중앙청 앞을 지나며 피 묻은 옷을 흔들었다. 나는 그곳에 서 있으면서도 그 옷이 아들의 옷이라는 것을 몰랐다. …밤새도록 아들을 기다리며 뉴스에 귀를 기울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창필아! 너는 나보다 후에 왔으나 먼저 갔구나!”(책 ‘4·19의 민중사’ 인용 부분)

참혹한 시신으로 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열사(1944∼1960)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1960년 5월 8일 어머니날(지금의 어버이날) 부산일보에 기고한 글에 “주열이는 바다에 던져지지 않았으면 (몰래) 화장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주열아! 어디 갔냐?’며 얼마나 울었던지…”라고 썼다.

책의 맨 앞자리는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초등학생 6명을 기렸다. 경찰의 무자비한 총탄은 어린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던 것. 안병채(서울 동신초) 박도일(부산 성남초) 임동성(서울 종암초) 전한승(서울 수송초) 정태성(서울 금호초) 강석원(전북 전주초)이었다. 이들은 10∼14세에 불과했다.

경찰이 시위 연행자들에게 가한 잔인한 고문도 등장한다. 당시 고려대 신입생으로 시위 도중 연행됐던 김수철 씨(1942∼2009)는 “경찰이 전기고문, 손가락 비틀기, 물속으로 담그기 등등 온갖 고문을 가하더니, 간혹 깨어나면 회유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고문 후유증 탓에 국립의료원에서 2년이나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안장된 열사 445명의 인적사항과 묘역 사진, 4·19혁명 약사와 연표 등도 실렸다. 방형남 국립4·19민주묘지 소장은 서문에서 “이분들의 투쟁과 희생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민주를 향유하며 자유를 누리고 있다”며 “4·19혁명을 온전히 기념하기 위해서는 민주열사 개개인에 대한 기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책은 4·19 유공자와 유족에게 헌정될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최신기사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