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울리면 철렁… 언제든 찾아오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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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감정노동자 권리보호센터

2016년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 입사한 20대 김모 씨는 지난해 여름 고민 끝에 서울시 산하 서울노동권익센터를 찾았다. 전화벨이 울릴 때면 손이 떨리곤 했다. 호텔에서 일할 때 수화기 너머로 한국어가 들려오면 외국어보다도 더 긴장됐다. 말을 함부로 하는 고객은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다.

“일을 왜 이따위로밖에 처리를 못 해?”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하는 손님들에게 공손히 대답할 때면 자신이 하찮은 존재로 느껴졌다.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숨쉬기가 어려웠다.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던 김 씨는 서울노동권익센터 ‘감정노동보호팀’에서 연계해준 10여 차례의 개인상담을 받은 후 자신이 호텔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다양하다는 자신감을 되찾고 직장을 계속 다니고 있다.

김 씨의 자존감 회복을 도운 감정노동보호팀은 올 10월 ‘서울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이하 감정노동보호센터)라는 독립기구로 확대·개편됐다. 위치는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인근에 있다. 주로 고객을 직간접적으로 대하는 감정노동은 자기감정을 절제하거나 실제로 느끼는 감정과 다른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업무를 말한다. 콜센터 상담원, 항공사 승무원, 금융창구 직원 등이 대표적인 직종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현재 전국의 감정노동 종사자 740만 명 중 35%인 260만 명이 서울에 근무하고 있다. 감정노동보호센터는 서울시에서 배포한 ‘감정노동보호 가이드라인’이 현장에서 잘 이행되고 있는지 등을 진단하는 근로환경 개선 사업과 심리 상담·치유 프로그램, 상담을 통해 직종별로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해 관련 정책 연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본보는 지난달 29일 감정노동보호센터가 영등포구에 있는 공공기관에서 콜센터 직원 13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심리치유 프로그램에 함께했다. 콜센터 직원들은 하루 평균 약 80∼100통의 전화 응대를 하고 있다. 수업이 진행된 교육장에는 ‘우리에게는 통화를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직원들은 “막상 계속 이야기를 쏟아내는 고객 전화를 끊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날은 4차례 예정된 음악치료 집단상담 프로그램의 첫 번째 시간으로 내담자들과 아이스 브레이크(ice break·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 어색함을 풀기 위해 하는 말)로 시작했다.

“이제 시간을 어제, 오늘로 좁혀 보세요. 언제 가장 긴장됐던가요?”

직원들은 인생에서 최근 일주일로, 다시 어제 오늘로 좁혀가며 긴장되는 순간을 떠올렸다. 직원 정모 씨(39)는 “대형 택배업체 파업 예고 소식을 듣자마자 화난 전화가 얼마나 걸려 올까 긴장했다”며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죄송하다고만 해야 할 때 힘들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에서는 긴장될 때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떠올리고, 사람 모형의 종이에 지금 느껴지는 감각의 부위를 색칠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속이 메스꺼워진다”, “손이 차가워진다”는 등의 대답을 쏟아낸 직원들은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머리나 어깨, 배 부위 등을 색칠했다. 강사는 “내게 어떤 신체 반응이 나타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현재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감정 괴리로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첫 번째 단계”라고 설명했다.

직원 이모 씨는 “오랜만에 색연필까지 잡아가며 내게 집중하는 시간이 좋았다”며 “마음을 지친 그대로 방치하는 게 아니라 달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치유”라고 말했다. 이들은 앞으로 남은 프로그램 3회에서 함께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등의 경험형 심리치유 활동을 하게 된다.

감정노동보호센터 관계자는 “개인·집단 심리상담 등 감정노동 치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니 언제든 편히 찾아오길 바란다”며 “다만 감정노동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정착되는 것도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무료 심리상담 장소와 시간, 신청 방법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감정노동보호센터 홈페이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감정노동권리보호센터#심리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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