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日 식민통치가 동양평화 침해” 법정서 당당히 맞선 안중근 의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1일 03시 00분


코멘트

안중근의 옥중투쟁과 공판투쟁

순국 직전 어머니가 보내준 것으로 알려진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안중근 의사. 그 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항소를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 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순국 직전 어머니가 보내준 것으로 알려진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안중근 의사. 그 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항소를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 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안중근 의사(1879∼1910)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와 옥중투쟁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 신속하게 이뤄진 수사과정과 공판

안중근 의사는 1909년 황병길 등 11인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했습니다. 회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일제와 싸울 것을 맹세하며 손가락을 하나씩 잘랐습니다. 동의단지회는 소규모의 결사대로 일제와 싸우기 위해 조직됐습니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방문해 러시아 대신 코콥체프를 만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동지와 자금을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브라우닝 권총으로 4발을 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습니다.

안 의사는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돼 1차 신문 뒤 일본의 하얼빈 총영사관에서 신문을 받았습니다. 안 의사는 뤼순감옥으로 옮겨졌고 미조부치 다카오 검찰관이 11번, 사카이 기메이 경시가 14번 신문했습니다. 미조부치 검찰관은 1910년 2월 1일 안 의사를 살인 혐의로 기소하고 공판을 청구했습니다.

공판은 1910년 2월 7∼14일에 6번 열렸습니다. 마나베 주조재판장에 의한 6번의 공판은 졸속으로 진행됐습니다. 한국인과 외국인 변호사의 변호 신청은 거부되었습니다. 6회 공판에서 안 의사의 사형 선고가 이뤄졌습니다. 일제는 사형 선고 후 약 40일이 지난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형을 집행했습니다. 수사와 공판, 사형 집행이 신속하고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화평화론’ 저술

의거 3일 전 중국 하얼빈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은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왼쪽부 터). 사진을 찍은 날 밤에 안중근 의사는 의거 결의를 담은 ‘장부가’를 지었고 우덕순은 ‘거의가’를 지었다. 당시 유동하는 17세였다.
의거 3일 전 중국 하얼빈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은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왼쪽부 터). 사진을 찍은 날 밤에 안중근 의사는 의거 결의를 담은 ‘장부가’를 지었고 우덕순은 ‘거의가’를 지었다. 당시 유동하는 17세였다.
안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5개월 정도 지냈습니다. 삶의 일상이 중지되고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는 어두운 감옥이었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본명 조성녀), 부인 김아려, 딸 현생, 아들 분도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일제는 안중근을 단순한 살인범으로 몰아 처형하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안 의사는 감옥에서 편지로 유언을 남기고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저술했습니다. 또 방문자들에게 200여 점의 유묵을 써 주었고, 현재 약 60점의 유묵이 남아 있습니다.

안 의사는 죽음을 앞두고 편지로 어머니에게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해 달라고 썼습니다. 부인에게는 장남 분도를 신부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동생에게는 자신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는 날 고국으로 옮겨 장사를 지내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동포에게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과 산업의 발전에 힘을 쏟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안 의사는 1909년 12월 13일부터 자신의 32년간의 삶을 담담히 적어 내려갔고 이듬해 3월 15일 자서전을 완성했습니다. ‘안응칠의 역사’라고 제목을 달았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 망명 후 ‘중근’이란 이름 대신 ‘응칠’이라는 이름을 썼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자서전에는 출생과 가족의 일화, 성장 과정, 천주교 입교, 지방관의 학정과 부패에 대한 저항, 교육구국운동, 의병전쟁 참여, 이토 히로부미 저격, 검찰과 재판관의 신문과 공판과정, 죽음을 앞두고 이루어진 마지막 천주교 성사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자서전 집필과 더불어 1910년 2월 17일부터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합니다. 책을 다 완성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제는 거부합니다. ‘동양평화론’은 5장으로 계획한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고 2개의 장만 서술했습니다.

○ 일제의 논리 정면 반박한 공판투쟁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 차남 준생, 장남 분도(왼쪽부터).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 차남 준생, 장남 분도(왼쪽부터).
일제의 논리를 대변하는 검찰관과 경시는 안 의사를 단순한 살인자 혹은 흉악범으로 몰아가려고 했습니다. 안 의사는 일제의 논리를 반박하며 공판투쟁을 이어갔습니다. 공판투쟁은 ‘통감통치에 대한 평가’와 ‘하얼빈 거사의 성격’을 둘러싸고 전개되었습니다. 검찰관은 한국은 독립국가를 유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이 통감통치를 통해 한국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한국을 그대로 두면 발전하기 못하기 때문에 문명국 일본이 한국의 문명화를 지도해 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안 의사는 통감통치는 동양평화를 해치는 것이며, 한국의 독립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습니다. 또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진행하는 문명개화는 ‘일본의 문명개화’일 뿐 ‘한국의 문명개화’는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초대 통감이었기 때문에 통감통치에 대한 평가는 하얼빈 거사의 성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습니다. 검찰관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단순히 오해해 살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찰관은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져가는 한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은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죄를 15가지 나열하고, 공판과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거를 정당화했습니다. 안 의사가 벌인 공판투쟁은 일제강점기 진행된 일제의 통치 논리와 독립운동의 논리가 집약되어 나타납니다. 안 의사는 시대를 앞서 식민통치의 논리를 반박하고 독립운동의 명분을 제시했습니다.

일제는 안 의사가 천주교 신자라는 점도 철저히 이용했습니다. 검찰관은 “천주교인이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라고 질문하며 압박했습니다. 이에 안 의사는 ‘의거론’으로 맞섰습니다. 살인은 죄악이지만 무고한 생명을 빼앗아간 포악한 자를 처단하는 경우와 무고한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행동인 경우에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의거론’을 한 단계 발전시켜 ‘의전론’을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행위는 조선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수행하기 위한 의병전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천만 동포를 대신해 독립전쟁을 수행하다가 잡힌 전쟁 포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옥중투쟁과 공판투쟁을 통해 완성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안중근의 옥중투쟁#공판투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