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낮 일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나가타초(永田町) 국회의사당 앞. 맞은편 인도에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더니 30분도 안 돼 100여 명이 모였다. 모자 양산 등으로 무더위에 맞선 이들은 시간이 되자 저마다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A4 종이부터 달력 크기의 종이, 색종이 등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종이 속 문구는 모두 같았다. ‘아베 정치를 용서하지 않아.’
○ 3년째 日 전역서 열리는 침묵의 포스터 집회
이들은 집회가 진행되는 30분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국회를 향해 포스터를 들어 올렸다. 격렬한 구호나 규탄 연설 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땀을 흘리며 침묵시위를 하는 이들에게 경찰들도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모습이었다. 30분이 지나자 “끝났습니다”는 소리가 들렸고 참가자들은 그제야 악수를 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매달 3일 국회 앞에서 열리는 침묵의 포스터 집회는 올해로 3년째 진행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추진하는 ‘평화헌법 9조’ 개헌에 반대하는 ‘9조의 모임’ 발기인 중 한 명인 여성 작가 사와치 히사에(澤地久枝·87) 씨가 2015년 6월 이 모임을 만들었다. 포스터 문구는 반전·평화를 외쳤던 일본 전통시가 ‘하이쿠(俳句)’ 시인 고(故) 가네코 도타(金子兜太) 씨가 직접 썼다. 글귀는 직설적이고 강렬하지만 모습은 조용하고 평화로워 ‘역설적인 집회’라 불리는 이 포스터 집회를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3일 현장에서 만난 사와치 씨는 “격렬하게 구호를 외치지 않고도 우리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이른바 ‘눈으로 보는 집회’를 만들고 싶었다”며 “젊은이부터 몸이 불편한 어른까지 참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14세’ ‘불은 우리 마음속에 있어’ 등의 대표작을 쓴 그는 최근 모리토모(森友), 가케(加計)학원 스캔들로 반(反)아베 시위 열풍이 불었을 때에도 노구를 이끌고 각종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집회는 국회 앞에서만 열리지 않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그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홋카이도부터 규슈까지 각 지역에서 포스터를 들고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집회가 끝난 후에는 저마다 SNS에 집회 ‘인증샷’을 공유하고 있다. 3년간 한번도 빠짐없이 집회에 참가했다는 구보타 후미요시(久保田文芳·67) 씨는 “아베 총리가 각종 문제에 침묵하고 있어 우리도 침묵으로 맞서는 것”이라며 “아베 총리뿐 아니라 주변 조력자들까지 퇴진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 “포스터 구호는 한국처럼 역동적”
16일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모리토모, 가케학원 스캔들에 대해 국민 2명 중 1명은 ‘계속 규명해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계속 오르고 있다. 석 달 전 20%대까지 떨어진 내각 지지율은 최근 40%대까지 회복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여론조사에서는 52%로 나타났다.
사와치 씨는 “아베 총리는 각종 스캔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며 “주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담고자 만든 것이 포스터 집회인데 3년간 일본 정치가 바뀐 게 없고 더 나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더한 암흑기를 맞이하기 전에 후세를 위해 일본 정치, 사회를 바꿔야 할 의무감을 갖고 있다”고 의욕을 내비쳤다.
국회 앞 집회에는 노인들도 다수 참가했다. “힘들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70대의 한 여성 참가자는 한국의 ‘촛불 집회’를 언급했다. 그는 “한국의 역동성에 자극을 받았다”며 “우리도 포스터 구호만큼은 직설적이고 역동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익 세력이 방해를 할 때도 있다. 5, 6대의 대형 자동차가 침묵하는 이들 앞에서 확성기로 “집에 가라”고 외친다.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곡예 운전’을 할 때도 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까. 사와치 씨는 망설임 없이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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