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방구학(路傍溝壑) 쌓인 주검 무주고혼(無主孤魂) 할 일 없다. 사지 해골은 제견(諸犬)의 상쟁(相爭)이다.”(임계탄·壬癸歎 중)
조선 후기 1732년(임자년·영조 8년) 전라도 장흥·강진 일대에서 발생한 대기근을 소재로 한 장편 한글가사 임계탄의 한 구절이다. 굶주림 끝에 기진맥진한 사람들이 길에서 죽어 까마귀나 개떼의 먹이가 되는 참혹한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이처럼 문학 작품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정부의 공식 문서보다 현실을 자세히 묘사한 경우가 많다. 최근 조선 후기 자연재해를 주제로 한 문학만을 다뤄 당대 실상을 파헤친 연구가 나왔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의 ‘전근대 한국 문학 속의 자연재해’라는 논문으로 다음 달 단국대 일본연구소의 학술지 ‘일본학연구’에 실릴 예정이다.
“우물에는 떠 마실 물이 없고/밭에는 먹을 만한 채소가 없네/산새는 저 혼자 무슨 마음으로/아침저녁 언제나 짹짹거리나.”
1782년(임인년·정조 6년) 경기 일대를 엄습한 가뭄 사태를 표현한 안산 지역의 양반사족 류경종(1714∼1784)의 시다. 그는 그해 3월부터 11월까지 가뭄과 피해 상황을 다룬 시만 20편 넘게 썼다. 정부 측 기록에선 정조의 반포문에서 “올해 농사는 경기의 흉년이 특히 심하고 경기 중에서도 연야(沿野)가 더 심하였다”고 기록된 것이 전부다.
1821년(신사년·순조 21년)에는 기록적인 홍수가 발생했다. 성해응이 지은 장편 4언시 ‘신사대수편’을 통해 당시 대홍수의 심각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강이 범람해 집이 통째로 물에 휩쓸려 내려간 모습을 표현한 시다. 성해응은 한양에 거주하던 관료로 한강 유역의 피해 상황을 주민들로부터 전해 듣고 이 같은 시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시기 조선 조정의 기록에 따르면 “6월 13일 북한산성에서 산사태로 11명이 죽고, 전국적으로 100여 명이 사망했다”는 짤막한 보고만이 남아있다.
안 교수는 “정부 보고서 등 공공의 사료는 재해를 대하는 관리의 태도에 따라 과장되거나 축소되기 쉽지만 문학은 저자의 체험과 정서가 가미돼 실상과 공포, 감정이 한층 실감나게 서술돼 있다”며 “문학 작품들은 사료를 보완하거나 의도적으로 숨겨진 재해를 고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1822년 조선 전역을 휩쓴 집단 콜레라 사태를 기록한 신현(1764∼1827)의 ‘성도일록’, 1832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인해 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표현한 서기수(1771∼1834)의 ‘희우(喜雨)’와 ‘추우탄(秋雨歎)’ 등 작품성과 현실 고발 기능을 갖춘 조선 후기의 문학 작품이 다양하다.
안 교수는 “천재지변 현상이 곧바로 국왕의 도덕성 내지 통치 능력과 깊이 연관된다고 믿는 인식으로 인해 이와 관련한 문학 작품 역시 많다”며 “재해를 기록하고, 이를 극복한 선조들의 지혜를 살펴볼 수 있는 연구”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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