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성철]뒷북만 치는 국정원 감찰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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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사회부 차장
전성철 사회부 차장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인 2013년 10월, 국가정보원 간부 L은 파면을 당했다. 그에게 적용된 징계 사유는 국가정보원법 위반과 뇌물수수, 국가공무원법 위반 등 모두 9가지나 됐다. L은 징계가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지만 지난해 8월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L은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 안팎에서 꽤 유명한 실세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각각 서울시장과 부시장일 때, 국정원 조정관으로 서울시를 출입한 덕분이었다. L은 당선자 인수위원회 인사검증팀과 대통령민정수석실에서 파견 근무를 한 뒤 2009년 초 국정원장 비서실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L이 파면을 당한 건 바로 그 무렵 벌인 일들 때문이다. 사건 기록에 따르면 2009년 초 L은 인사 담당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과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는 부하 직원들을 감찰실에 심었다. L의 도움으로 감찰실에 들어간 이들은 각종 내부 동향을 파악해 직속 상사 대신 L에게 보고했다. 또 L과 갈등 관계이던 일부 직원에 대해서는 미행 등 뒷조사도 서슴지 않았다.

이후 정권이 바뀌자 새로운 국정원 수뇌부는 ‘원세훈 지우기’에 나섰다. L이 감찰실의 첫 타깃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L은 “실무자로서 원 전 원장이 시킨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원 전 원장은 L이 국정원을 상대로 징계무효 소송을 벌이는 동안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요즘 국정원 내부는 L이 파면당할 때와 여러모로 닮았다. 지난해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진 후 실세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추명호 전 국장은 L처럼 박근혜 정부가 출범할 때 인수위에 파견을 다녀온 경력이 있다. 추 전 국장이 L보다 직급이 높다는 점만 다를 뿐, 정권 실세와의 친분을 배경으로 전횡을 저지른 스토리도 상당 부분 L의 그것과 닮았다. 감찰실이 선봉에 서서 전 정권 ‘부역자’들을 손보는 상황은 아예 데칼코마니다.

달라진 점은 국정원의 감찰 상황이 매우 신속하게 외부에 중계되고 있다는 정도다. 4년 전 L이 파면됐을 때는, 국정원은 언론 보도 이후에도 정보기관답게 “확인해줄 수 있는 내용이 없다”는 자세였다. 반면 최근 추 전 국장 등에 대한 감찰은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를 통해 실시간으로 언론에 전파되고 있다. 정보기관의 내부 비위가 감찰이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외부에 공표돼도 괜찮나 싶을 정도다.

L이 파면을 당한 4년 전 일이나, 국정원 내부의 최근 상황을 ‘보복 감찰’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L이나 추 전 국장은 분명히 어느 정도 잘못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번 정권이 바뀐 이후에야 국정원 감찰실이 끈 떨어진 실세의 비위를 들추며 뒷북을 치는 모습은 보기 흉하다. 그들은 L이나 추 전 국장이 기세등등할 때, 그리고 국정원 심리정보전단이 문제의 ‘댓글 작업’을 할 때 나섰어야 했다. 감찰실이 힘 있는 간부들의 불법과 일탈에 눈을 감는 버릇을 고치지 않는 한, 국정원은 영원히 개혁 대상일 수밖에 없다.

민간인 댓글 부대 운용 의혹이건, 국정원과 정권 실세의 유착 의혹이건 문제가 있었던 일은 확실히 정리하고 가는 게 옳다. 다만 그 과정은 법과 절차를 따라야 하고, 누군가의 사적 이해가 개입되거나 망신 주기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또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제대로 감찰 시스템을 손질해 더 이상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
#국가정보원#국정원 감찰실#원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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