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화가였던 사임당이 ‘현모양처’가 된 까닭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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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고연희 등 지음/228쪽·1만8000원·다산기획
◇사임당전/정옥자 지음/420쪽·2만2000원·민음사

신사임당이 그린 원추리 꽃. 그의 초충도는 조선 후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오죽헌시립박물관 제공
신사임당이 그린 원추리 꽃. 그의 초충도는 조선 후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오죽헌시립박물관 제공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인가, 율곡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사표(師表)인가. 남존여비의 조선시대에 신사임당(1504∼1551년)만큼 끊임없이 재조명된 여성은 없을 거다. 나라마다 현금 최고액 지폐에 대표 인물을 선정하는데, 우리나라 5만 원권 지폐에 사임당이 들어간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예술과 모성은 어떻게 보면 양립하기 힘든 가치인지 모른다. 물론 멕시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처럼 모성에 대한 갈망이 예술 혼으로 승화하기도 한다(그는 교통사고 휴유증 등으로 임신에 실패했다). 그러나 자기를 내려놓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모성상은 나를 중심에 놓아야 하는 예술의 속성과 상충할 여지도 있다.

 고연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등 다섯 명의 각 분야 학자들이 쓴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은 16세기부터 현재까지 500년간 이어진 사임당 해석의 변천사를 추적했다. 미술사, 한국사, 동양철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시대상에 꿰맞춰지고 왜곡된 사임당의 이미지를 분석했다.

 예를 들어 율곡 사후 그를 추숭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사임당보다 율곡의 부인 노씨가 부각됐다. 율곡의 수제자 김장생(1548∼1631)은 스승의 행장(行狀·죽은 이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을 쓰면서 사임당 이상으로 노씨의 시집살이와 임진왜란 때의 의로운 죽음을 크게 다뤘다. 저자는 예학(禮學)을 주창한 김장생이 가족 내 ‘종법(宗法) 질서’를 강조하면서 오랜 기간 시댁에 헌신한 노씨를 일부러 부각시켰다고 본다. 사임당의 경우 38세에 서울 시댁으로 상경하기 전까지 강릉 친정에서 약 20년 동안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임진왜란 이후 부계 중심의 종법 질서를 강조한 예학자들이 보기는 부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사임당의 예술 행위도 주자성리학 이념에 따라 재단되기 일쑤였다. 율곡을 조선성리학의 완성자로 추앙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의 평가가 대표적이다. 그는 율곡의 후손이 사임당이 그린 산수화에 발문(跋文·작품에 대한 감상평)을 요청하자, 진짜인지 의심스럽다는 요지로 글을 썼다. 자랑스러운 조상의 작품에 명사(名士)의 발문을 첨부해 공덕을 선양하려던 후손들은 아마 패닉이 됐을 것이다. 우암의 위작 운운은 예술적 안목에 기인한 판단이 아니었다. 사임당의 그림에 그려진 스님과 오래전 발문에 오른 한시가 성리학 이념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암을 비롯해 17, 18세기 이후 성리학자들은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를 높게 평가했다. 이들은 풀과 벌레와 같은 미물에도 관심을 쏟은 사임당의 이미지를 통해 자애로운 어머니상을 추출하려고 했다. 우암이나 김장생의 사임당 해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무너진 조선의 가치관을 율곡을 정점으로 한 조선성리학을 통해 재구축하려 한 시도였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반면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간 ‘사임당전’에서 또 하나의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현대적 해석에서 탈피해 인간 신사임당의 민낯을 보려고 시도한다. 그는 사임당이 친정의 경제력에 기대 취미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며 단순히 자식 덕을 본 어머니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임당은 경제력이 없는 남편 대신 자수로 생활비를 홀로 감당하면서도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을 평가할 만하다는 것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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