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켓 익히니 품위가 솔솔… “선배 시민이라 불러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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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갈등 푸는 ‘노인의 품격’]<下>‘시니어 매너’ 학습하는 어르신

22일 서울 종로구 종로노인종합복지관 무악센터에서 밴드체조 수업을 듣는 노인들이 밴드로 ‘매너’란 글자를 만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매너 없는 노인을 향한 비난과 노인의 항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취재 도중 만난 노인 중에는 젊은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 할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들의 행동은 복잡하지 않았다.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전단지 하나라도 꼭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 같은 작은 실천이었다. 젊은이들이 지키는 형식적인 매너보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이들은 “기본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거나 “젊은이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노인을 젊은이가 따라가야 할 품격 있는 ‘선배 시민’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시작되고 있었다. 》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옆 커피숍 2층에서 얘기를 나누던 박분녀 씨(67·여)와 황명옥 씨(67·여)가 잠시 뒤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일회용 컵을 포개서 재활용쓰레기통에 넣고 물티슈와 휴지로 테이블을 닦았다. 빵 부스러기로 지저분하던 테이블이 이내 깨끗해졌다. 두 사람은 소파 위에 떨어진 작은 빵 부스러기까지 털어내고서야 자리를 떴다.

박 씨는 “젊었을 때는 내 방식대로 살아야지란 생각도 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지더라”고 했다. 기자가 “보통 손님들은 자리 정리를 커피숍 직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다”고 하자 “집에서도 본인이 먹은 자리는 본인이 치우지 않느냐”는 박 씨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처럼 젊은이보다 훌륭한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노인도 많다. ‘시니어 매너’를 알리는 노인복지회관도 늘고 있다.

○ ‘노인의 품격’ 갖추는 시니어들

이날 오후 서울 종로노인종합복지관 무악센터에서는 아카데미 수업 말미에 매너 수업과 토론이 곁들여졌다. 재테크 방법을 수업한 시니어 파트너즈 소속 김수일 강사(56)가 그림을 동원해 15명의 수강생에게 ‘젊은 세대가 싫은 상황’과 ‘젊은 세대가 노인 세대를 싫어하게 되는 상황’을 물어봤다. 공공장소에서 서로 끌어안고 스킨십하는 젊은 세대의 ‘꼴불견’을 보여 준 뒤에 노인이 시끄럽게 떠들고 새치기하는 그림을 보여 주자 수강생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들이 보기에 최근 젊은이들의 개인주의가 지나쳐 보이는 것처럼 노인이 무심코 젊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있다는 깨달음이다.

수강생 박외술 씨(69)는 “지하철에서 노약자석이 아닌 쪽으로 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했다. 힘들게 직장 다니며 출퇴근하는 젊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배려를 공유한 것이다. 각자 ‘시니어 매너’를 공유하는 것을 지켜본 김 강사는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도록 하면 어르신들이 많이 공감한다”고 설명했다.

○ 함께 배우는 ‘시니어 에티켓’

‘시니어 에티켓’ 동영상을 만들어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 올리는 노인들도 있다. 서울 강남시니어플라자에 다니던 노인 10여 명은 식당 예절과 휴대전화 예절, 대화 예절을 주제로 3편의 동영상을 만들었다. 새치기와 시끄러운 휴대전화 사용, 젊은 사람에 대한 하대 등을 다뤘다. 식당에서 거리낌 없이 새치기하거나 사회복지사를 ‘박 양’이라고 부르는 노인의 모습을 콩트 형식으로 그렸다.

영상에서 악역을 맡았던 정우영 씨(77)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줬더니 ‘잘했다. 저런 것이 문제다’라고 공감하더라”고 말했다. 영상 제작에 참여한 이상초 씨(73)도 “일종의 희극으로 만들어서 ‘꼭 지키자’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이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호갑 강남시니어플라자 관장은 “무엇보다 훈계가 아니란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노인이 노인에게 권하는 방식의 캠페인도 좋다”고 밝혔다.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는 ‘강남스타일 시니어 봉사단’을 만들어 노인 스스로 에티켓 관련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매너 교육을 하는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 싹트는 매너 교육…‘노인’ 대신 ‘선배 시민’

아직 시니어 매너 교육이 활성화되지 못했지만 현장 전문가들은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키워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종로노인종합복지관 무악센터의 박혜영 과장은 “복지관을 찾는 분들은 비교적 점잖은 편이지만 ‘이미지 메이킹’ 수업 등에서 매너 교육을 하고 있다”며 “최근 불거진 갈등 등을 고려해 내년부터는 매너 교육을 조금씩 늘려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매너 교육을 단일 과정으로 편성하지 않아도 여러 수업에 조금씩 녹여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무악센터와 연계된 경로당들에 시니어 매너를 안내하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자리 잡은 서울노인복지센터는 ‘인생학교’란 이름의 1일 교육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노인들에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알리는 이 교육에는 매너와 배려 교육, 화장실 청소 같은 봉사활동 등이 포함돼 있다. 이 센터의 최선희 과장은 “젊은 세대에게 멋진 선배, 멋진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센터에서 앞세운 단어는 바로 ‘선배 시민’. 단순히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니라 배울 것이 있고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사회구성원이라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다. 최 과장은 “내년엔 지역사회에서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노인 세대가 스스로 ‘내가 시민으로서의 역할이 있다’고 느끼고 ‘난 선배 시민이다’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세대갈등#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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