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통일 외교, 공짜 점심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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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욱 정치부장
정연욱 정치부장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 이후 청와대가 속도 조절에 나선 듯하다. 박근혜판 ‘통일 외교’에 시동이 걸렸다는 들뜬 분위기에 부담을 느낀 탓이다. 화려한 수사를 걷어내고 차분히 속내를 따져 봐야 할 때다. 외교적 협상을 ‘선의(善意)’로만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중 정상회담 언론보도문에는 ‘중국 측은 장래에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통일의 주체는 남북을 아우르는 ‘한민족’이지, 대한민국이 아니다.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중국이 (한반도) 정세 긴장을 초래하는 그 어떤 행위에도 반대한다’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 방점이 찍혔다고 해석하고 싶겠지만 남북한 모두에 보내는 메시지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두 나라의 온도 차가 느껴진다.

전직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최근 중국 핵심 인사들에게서 들은 얘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5년 전 북한의 천안함, 연평도 도발 때 중국 수뇌부가 내부적으로 우리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참석자의 절반 이상이 ‘한국 정부가 대응 사격에 나설 것’이라고 하자 급히 한국에 특사를 보냈다. 긴장 확대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피해를 본 우리 정부가 오히려 확전을 막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한숨을 돌렸다고 한다.”

요즘 북-중 관계가 나빠졌다고 해도 ‘남북한 현상 유지’라는 중국의 사활적 이익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통일 외교의 핵심은 결국 주변 열강들의 마음을 사는 것이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주변 열강의 ‘동의’는 핵심적 변수다.

미국은 동북아에서 특정 국가의 패권이 두드러지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19세기 말∼20세기 러시아나 일본 제국주의가 그랬듯이 지금은 중국이 표적이 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3일 전승절 행사에서 “중국은 앞으로 강해져도 패권주의나 팽창주의를 모색 안 한다”고 선언한 것도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미국 내부에서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을 놓고 “중국에 너무 치우친 것 아니냐”는 반감이 적지 않은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한미동맹은 만사형통의 보증수표가 아니다. 서로가 동맹의 실익을 공유해야 한다. 10월 16일 한미 정상회담이 중요한 이유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한반도를 에워싼 역학관계를 ‘한중 프레임과 미일 프레임’의 대결 구도로 몰고 간다면 우리의 균형 외교는 자칫 ‘왕따 외교’로 전락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 균형자론’이 얼마나 허망한 실체를 보였는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독일 통일의 일등공신인 헬무트 콜 전 총리는 독일 통일을 경계하는 주변 열강의 마음을 돌리는 데 외교력을 집중했다.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를 수용해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 냈고, 러시아를 돌려세우기 위해 대규모 경제 지원 등을 약속했다. 가장 반대가 심했던 프랑스에 대해선 마르크화의 희생을 무릅쓰고 유럽통화제도 도입과 신속한 유럽 통합을 약속하며 돌파했다. “통일 독일은 훌륭한 우방이 될 것”이라는 홍보전이 바닥에 깔렸음은 물론이다.

처음으로 독일 통일을 이룬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신(神)이 역사 속을 지나갈 때 그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고 갈파했다. 박 대통령은 이제 통일 외교의 시동을 걸었다. 통일 외교라는 ‘신의 옷자락’을 붙잡는 일은 “통일 한국은 당신 국가에도 이익이 된다”는 공감대에서 시작한다. 이어 주변 열강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교한 협상이 뒤따라야 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

정연욱 정치부장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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