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태원]대통령의 결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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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정치부 차장
하태원 정치부 차장
대통령은 궁극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자리다. 여론 수렴과 고뇌의 시간을 거치겠지만 결국 최종적인 판단은 대통령이 한다. 백악관 집무실 책상에 올려놓은 명패에 쓰인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1945년) 결정을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그 맛에 대통령 하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결단의 과정은 고통스럽다. 매일 점심 뭘 먹을까로도 고민하는 게 사람인데 국가의 사활(死活)이 걸린 결정을 삼시세끼 먹듯 내려야 하는 위치에서 느끼는 중압감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변화와 희망’을 설파할 때 파릇파릇해 보이기까지 했던 버락 오바마의 머리에도 어느새 함박눈이 내렸다.

2주 후면 임기 반환점(25일)을 맞는 박근혜 대통령도 이미 숱한 ‘결단의 순간’과 씨름해 왔다. 불행한 일이지만 ‘만사(萬事)’라고 하는 인사 선택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일방통행식으로 던져지는 대국민 담화에 대해서는 ‘메시지 거부’의 조짐마저 느껴진다. 세월호 참사 직후 강행했던 지난해 5월 중동 방문, 메르스 여파로 취소했던 올해 6월의 미국 방문은 숱한 뒷말을 낳았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이번 주 박 대통령은 또다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남북대화 제의에 북한은 목함지뢰를 ‘선물’했고, 한일 수교 50주년 기념 리셉션 교차 참석으로 성의를 보였지만 아베 신조의 담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정부 고위 당국자)이란다. 그래도 북한을 달래고 일본을 얼러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8·15 경축사에 담아야 한다.

중국이 다음 달 3일 개최하겠다는 항일·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는 대통령을 더 고뇌하게 한다. 그동안 국내 행사였던 것이 하필 올해부터 각국 정상을 초청하는 대규모 국제 행사로 격상됐다. 중국의 ‘군사적 역량’을 과시할 대규모 열병 행사도 예고됐다.

중국은 일찌감치 박 대통령 행사 참석에 많은 공을 들였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보이콧이 확실한 상황에서 박 대통령을 VVIP로 모실 태세다. 미중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려는 한국의 진의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7월 방한한 시진핑 주석 환영만찬과 주한 미국대사관의 독립기념일 만찬이 한날한시에 열렸다. 주한 미국대사관 고위 관계자는 “중국이 한국에 ‘미국이냐 중국이냐’란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박 대통령의 마음은 8할 정도 행사 참석으로 기운 듯하다. 필자도 가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미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참여했고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에도 서명한 마당에 이번 방중이 한미동맹 균열을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은 지나친 기우(杞憂)다.

끊임없이 한미동맹을 이간질해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아베 정부의 기회주의적 책동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결정이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한중 관계를 조화롭게 발전시킨다’는 대외정책 기조에 부합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포커페이스가 잘 안되는 박 대통령의 감정이 시 주석과의 만남에서 어떤 형태로 표출될지 관심이다. 박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이 방중 기간 중 공개될 한 장의 사진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의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일 사죄의 상징이 되었듯 박 대통령이 남길 한 장면도 남은 임기 중 대중, 대미 관계의 전반적 기조를 보여줄 척도가 될 수도 있다.

하태원 정치부 차장 triplets@donga.com
#대통령#결단#등거리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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