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승정원일기, 아직 ‘2억300만 자’가 남아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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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1992년 유네스코는 ‘세계의 기억’이라는 테마로 인류의 기록유산이 미래에 온전히 전수될 수 있도록 세계기록유산을 선정하기로 하였다. 이를 통해 기록유산의 보편적 접근성을 향상시키고 기록유산의 존재와 중요성에 대한 세계적인 인식을 제고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는 현재 총 11종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국가에서 기록한 거질(巨帙)의 역사 기록물이 포함되어 있다. 1997년 조선왕조실록이 처음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2001년에 ‘승정원일기’가, 2011년에 ‘일성록’이 등재되었다. 한 국가의 역사 기록이 3종이나 등재된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3종 모두 조선시대 궁중의 기록이면서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는 소중한 역사 자료이다.

특히 ‘승정원일기’는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지금의 대통령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남긴 그날그날의 일기이다. 정7품 주서(注書)가 하루 종일 임금을 시종하면서 국정 전반에 관한 보고와 이에 대한 임금의 명령, 임금과 신하의 대화 등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인조 대부터 순종 대까지 288년간의 기록으로 글자 수는 무려 2억4300여만 자에 달한다. 만약 ‘승정원일기’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으로 소실되지 않았다면 족히 두 배가 넘는 5억여 자는 되었을 것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25사(史)’는 중국 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도 총 4천만자가량에 불과하다. 우리의 팔만대장경(5000만 자)이나 조선왕조실록(5400만 자)과 비교해 보아도 ‘승정원일기’의 방대한 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승정원일기’는 양도 양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다양한 역사 현장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금과 신하가 경연(經筵)에서 학문을 토론하는 장면, 내의원에서 임금을 진료하면서 문진(問診)하는 장면, 임금과 신하가 현안을 두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 등을 보면 마치 그때 그 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승정원일기’는 상세하고 생생한 기록의 특성상 기록 그대로도 수많은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문화콘텐츠의 보고이다. 요즈음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KBS ‘역사저널 그날’도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많은 역사 자료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번역을 못한 2억300여만 자가 남아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철주야 번역해 왔지만 ‘승정원일기’를 번역한 양이 4000여만 자에 불과하다.

현재와 같은 인원과 예산으로는 50년을 더 기다려야 완역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예산만 증액된다 하여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번역 인재를 양성하는 것 또한 시급한 과제다. 일반인들은 한문만 알면 어떤 책이든 번역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역사서는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제대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교육원을 대학원대학교로 개편하여 역사 기록물에 대한 맞춤형 번역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유네스코에서 ‘승정원일기’를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한 이유는 기록유산의 보편적 접근성을 향상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2억300여만 자를 읽을 길이 없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앞으로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세계가 인정한 기록유산을 그 나라 사람이 읽을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을 우리가 읽지도 못한다는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들은 그 나라 국민이 자기 나라 역사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디 당대에 선조들의 유산을 모두 번역하여 우리 후손들이 자유롭게 읽고 활용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승정원일기#2억300만 자#세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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