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태원]‘부끄러움’에 대하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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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정치부 차장
하태원 정치부 차장
‘이케아(IKEA) 연필거지’ 기사를 보면서 워싱턴특파원 근무시절 한 장면이 퍼뜩 떠올랐다. 패스트푸드점 탄산음료는 대부분 ‘무한리필’인지라 4명이서 식사를 하면서 음료는 2잔만 시킨 적이 있다. 빨대 두 개만 더 꽂으면 되니 돈도 절약되겠거니 하는 셈법이었다. 근데 왠지 주위의 시선이 좀….

애써 태연하게 넘겼지만 나중에야 그 묘한 시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음료를 안 마신다면 모를까 머릿수대로 컵을 사는 게 올바른 에티켓이었던 것. 그것도 모르고 4명이서 2잔의 컵을 들고 부산하게 리필을 해댔으니…. 대놓고 ‘삿대질’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절대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미국에서 살던 집 발코니에 이불을 널었을 때도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 있다. 집 뒤편이고 햇볕이 워낙 좋아 본능적으로 눅눅한 이불을 ‘일광욕’시키고 있었는데 점잖아 보이던 옆집 노부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운하우스 관리 매뉴얼에 ‘미관을 해치는 물건을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곳에 방치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단다.

공인중개사를 하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미국 중산층은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의 품격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생각이 강하다”며 “이웃의 행동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탓”이라고 했다.

미국의 시민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피어 프레셔(동료집단의 사회적 압력)’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살아가려면, 아니 생존하려면 지키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법률보다 더 강한 기속력을 갖는 마법의 힘. 강하게 힐난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묘한 기류 같은 것이다.

이런 압력은 공적사회의 영역에서도 자주 감지된다. 2008년 대선 당시 44세의 젊은 나이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선출돼 큰 주목을 받았던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는 콘텐츠 부족과 지나친 강성 보수 발언 등이 누적되면서 정치권의 퇴출 압력을 받았다.

언론계의 노벨상 격인 퓰리처상을 세 번이나 받은 워싱턴포스트의 27년차 베테랑 기자는 지역 일간지 두 문장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인용했다가 3개월 정직됐다. NBC의 간판 앵커도 12년 전 이라크전(戰) 취재 무용담이 허풍으로 들통 난 뒤 ‘진심으로’ 사과했지만 6개월 정직을 면치 못했다. 요구하는 기대수준을 충족하지 못한 데 대한 동료들의 응징이리라.

우리 정치판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늦었지만 야당 대표가 모처럼 용기를 내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에 처음으로 참배를 했지만 당 최고위원이라는 사람은 ‘히틀러 묘역-야스쿠니신사 참배’라고 폄훼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봉하마을 참배를 두고도 “얼굴 두껍다”며 비아냥거린 바로 그 의원이다. 무서워서 피하는지 더러워서 안 건드리는지 동료 의원들이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했다는 말은 안 들린다.

여당 의원들도 ‘도긴개긴’이다. 각종 의혹으로 만신창이가 된 총리 후보자 앞에서 “제가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분”이라며 감싸고 드는 동향(同鄕) 의원의 모습은 민망하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하다.

여당 보수혁신위원회가 6개월의 활동을 사실상 종료했는데 개혁은 정작 용두사미로 끝날 것이라는 소식이다. 총리 후보자 인준 투표 소란에 파묻혀서인지 국민과의 약속은 어디 갔느냐는 항의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대충 뭉개고 가려는 지도부의 의지 부족에 죽비(竹H)를 내리치는 ‘피어 프레셔’도 없는 진공상태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곳이 국회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하태원 정치부 차장 triplets@donga.com
#이케아#피어 프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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