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거 野]2002 월드컵 세대, 2008 베이징 세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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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40만 부 이상 팔린 ‘아웃라이어’는 성공한 사람들을 다뤘다. 아웃라이어는 표본 중 다른 대상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통계적 관측치를 말한다. 저자인 맬컴 글래드웰은 이 책에서 “성공은 집중력과 반복학습의 산물”이라며 ‘1만 시간의 법칙’을 주장한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얘기다. 그래서 그가 강조한 또 하나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사회가 주는 ‘특별한 기회’와 ‘역사·문화적 유산’의 중요성이다. 책에 따르면 캐나다 아이스하키 선수 중에는 1분기(1∼3월)에 태어난 이들이 유난히 많다. 유소년 리그가 1월 1일을 기준으로 선수를 선발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의 발육 수준은 몇 개월 차이도 크다. 같은 해라면 1∼3월에 태어난 아이들이 체격이 커 선발 과정에서 유리하다. ‘운 좋게’ 그때 태어나 특별한 기회를 잡은 것이다.

▷2002년 한국은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뜨거운 축구 열기를 경험했다. 부와 인기를 누리는 축구 스타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 반면 야구에 대한 관심은 줄었다. 2001년 299만 명이던 관중은 2004년 233만 명까지 떨어졌다. 부모들은 너도나도 자녀에게 축구를 시켰다. 손흥민, 구자철, 지동원, 윤빛가람 등 최근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젊은 선수들이 이 즈음에 축구를 시작했다.

▷모든 분야에는 총량이란 게 있다. 한정된 자원이 한 곳으로 몰리면 다른 곳들은 그 반대다. 야구도 그랬다. 2002년 284명이었던 리틀야구 선수는 이듬해 218명으로 급감했다. 야구를 하던 아이가 축구로 옮겨가는 일도 많았다. 한 야구 관계자는 “한일 월드컵 이후 키 크고 운동 좀 한다는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축구 선수를 시키려고 했다”고 기억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프로야구는 2007년을 마지막으로 데뷔 첫해에 신인상을 받는 ‘순수 신인왕’이 나오지 않고 있다.

▷움츠렸던 야구가 고개를 든 것은 2006년 한국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4강 신화를 달성하면서부터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에 당당히 맞서는 태극전사들을 보며 아이들은 글러브와 배트를 손에 쥐었다.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그 수가 많지 않아 진입장벽이 높다. 그런 자녀를 위해 부모는 리틀야구의 문을 두드렸다. 2006년 17개였던 리틀야구 팀은 이듬해 39개로 급증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우승과 2009년 WBC 준우승의 쾌거는 리틀야구 확산에 또 한 번 불을 지폈다. 2010년 팀은 100개를 돌파했고 선수 수도 2000명을 넘었다.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이 29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올랐다. 선수 전원은 서울지역 리틀야구 팀 소속의 중학교 1학년들로 구성됐다. 초등학교 때도 학교 야구부가 아닌 리틀야구 팀에서 실력을 키운 아이들이다. 저변이 확대된다는 것은 경쟁이 치열해짐을 의미한다. 선수들은 수많은 또래와의 경쟁에서 앞선 덕분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또한 한국야구위원회(KBO)가 2007년 이후 리틀야구장 건립 및 개보수에 10억 원 이상을 투자하고 대회 개최 및 용품 보급에도 매년 10억 원 이상을 지원하는 등 유소년 야구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도 선수들의 기량을 높이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우승컵을 품에 안은 어린 선수들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특별한 기회와 역사·문화적 유산을 잘 활용한 아웃라이어들인 셈이다. 이들이 훗날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월드컵#리틀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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