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성진]아, 슬픈 공직(公職)이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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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진 국민대 명예교수 전 법무부 장관
정성진 국민대 명예교수 전 법무부 장관
민주사회에는 신분적 특권층을 상징하는 양반이 따로 없다. 물론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아직도 ‘그 사람 참 양반이지’라는 식의 좋은 의미의 사회적 평가는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때의 양반이라는 표현 속에는 점잖고 품격이 있다, 또는 체면을 안다는 긍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실제로 사람을 평가할 때도 특정인의 성씨를 두고 양반 여부를 따지는 일은 많지 않지만, 그의 행동거지에 양반 같은 품격이 있는지는 이따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청문회의 진행 과정이나 그 결과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도 필자는 많은 국민이 해당 후보자의 정책수행능력이나 비전보다도 그 답변 자세나 거짓말 유무와 같은, 비유컨대 ‘양반스럽지 못한’ 태도에 더 큰 실망과 비판을 가한다는 인상을 받아 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양반스럽다는 뜻은 서양식으로 표현하자면 귀족적이란 의미보다 ‘신사다운 또는 숙녀다운’이란 뜻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고려시대 관제상의 문·무반에서 시작된 양반이란 말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배신분층 또는 사족(士族)을 지칭하는 뜻으로 굳어져 왔다. 물론 조세 및 병역 등 특혜나 조선조 말기 양반 계급의 부패상에 대하여는 많은 비판이 있어 왔지만, 세습해 온 양반 가계에 대한 사회적 평가나 공경의 정서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정치에 참여한 관료나 학자인 사림(士林)이 대부분 양반 계층이었으므로 그들의 언행과 품성은 나름대로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되어온 측면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대유학자인 퇴계 이황(李滉)이 이조판서 직을 포함한 관직 제수(除授)를 20여 차례에 걸쳐 불응 또는 사퇴를 하였다거나,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던 한강 정구(鄭逑)가 대사헌과 같은 공직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손들은 오히려 그의 예학과 교학 등 분야에서 쌓은 학자로서의 명성에 더 큰 긍지를 가지는 것을 보면,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는 분명 공직 자체보다도 오히려 양반다운 기품이나 몸가짐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직자로서의 업무수행능력이나 국정 기여도 또는 성과의 문제로 들어가면 우리는 관점을 완전히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교문화가 지배하던 조선조와 달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지금의 사회체제 아래서는 단순히 몸가짐의 양반스러움이나 신사다움만으로는 부족하고, 가열한 국제경쟁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폭넓은 안목과 실용적 리더십, 그리고 사회공공의 이익을 위한 헌신성까지 갖추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와 변화된 시대 상황 및 국제적 환경 등을 모두 고려한다면 공직자는 그 업무수행 과정에서 결코 종래의 양반 같은 체면이나 형식성에 사로잡히기보다 실용성을 앞세운 경쟁력과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여야 하되, 스스로를 다스리는 몸가짐만은 전통사회의 양반과 같은 또는 그 이상의 기품과 권위를 지키는 방향으로 이끌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이를테면 업무에서는 양반스러움을 과감히 버리고, 거취를 포함한 스스로의 몸가짐에 있어서는 오히려 고루한 양반스러움을 확실히 지키는 이원적 모습을 다수의 국민은 바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유교문화의 탓만으로 볼 수는 없다. 조선시대의 양반문화를 되찾자는 뜻도 물론 아니다. 문화를, 아무리 잊으려 해도 쉽게 잊히지 않고 배우려고 해도 쉽게 배워지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공직윤리의 문제이자 사회의 투명성과 직결되는 과제이며, 많은 국민이 바라는 오늘을 사는 공직자의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진짜 양반스러운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더이상 공직을 맡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고 그런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 슬픈 공직이여!

정성진 국민대 명예교수 전 법무부 장관
#장관 후보자#인사청문회#도덕#공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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