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결재 클릭만” 윗선 발뺌 그대로 수용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국정원 증거조작’ 수사 발표]
38일만에 A4용지 달랑 3장 반

“국가정보원 직원의 컴퓨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국정원 내부 결재시스템까지 모두 점검한 결과물이다.”

올해 2월 14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의혹이 불거진 지 59일, 지난달 7일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지 38일 만에 내놓은 검찰 진상조사팀의 발표문은 A4용지 3장 반 분량에 불과했다. 증거를 상당수 공개할 것이라는 예상도 빗나갔다. 다만 수사책임자인 윤갑근 대검찰청 강력부장은 “공소 유지에 자신 있다”며 수사 결과를 자신했다.

검찰은 증거조작이 국정원 대공수사국의 수사팀장을 맡았던 이모 처장(54·3급) 주도 아래 4급 직원인 권모 주선양 총영사관 부영사(50), 김모 국정원 대공수사국 과장(47·구속기소), 이모 주선양 총영사관 영사(48) 등 3명과 조선족 협조자 김모 씨(61·구속기소)가 공모한 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공수사국의 중간 간부 4명이 관여했지만 국정원 지휘부 차원의 조직적인 범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남재준 국정원장과 대공수사국장, 수사와 기소를 담당했던 검사도 모두 무혐의 처분됐다.

○ “中이 위조라고 주장한 문건 3건 중 2건은 위조”

탈북자라고 속여 서울시 공무원으로 활동했던 유우성(류자강·34) 씨는 지난해 8월 1심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받았다. 국정원과 검찰은 유 씨의 항소심에서 유죄 입증을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3건의 문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첫째는 유 씨의 출입경 기록, 둘째는 출입경 기록을 발급해줬다는 허룽 시 공안국의 확인서, 셋째는 지난해 12월 유 씨의 변호인이 제출한 중국 싼허(三合)변방검사참(출입국사무소)의 정황설명서를 반박하기 위해 싼허검사참의 답변서 등이었다. 검찰은 둘째와 셋째 문서를 위조로 판단했다.

검찰은 두 번째 문서가 서울 국정원 본부에서 대공수사국 김모 과장의 부인 이름으로 가입된 인터넷 팩스 사이트에서 발송된 사실을 확인했다. 주선양 총영사관과 국정원 본부의 팩스 송수신 내역을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전달 경위를 모두 입증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검찰과 외교부는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때 “공식 외교경로(허룽 시 공안국→주선양 총영사관→외교부→대검찰청)로 전달받았다”고 해명한 바 있다.

또 올 1월에 제출된 세 번째 문서는 협조자 김 씨를 통해 위조해 사실인 것처럼 영사 확인서까지 받았다.

다만 검찰은 첫 번째 문서, 즉 유 씨의 변호인이 제출한 중국-북한 간의 ‘출입입입’(出入入入) 기록을 반박하기 위해 국정원이 또 다른 조선족 협조자를 통해 확보한 ‘출입출입’(出入出入) 기록은 위조라는 판단은 유보했다. 검찰 관계자는 “중국 측이 대조 원본을 검찰에 보내오기 전까지는 명백히 위조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 3급 처장이 범행 주도…그 윗선은 증거 없어

검찰은 이 처장의 윗선을 규명하기 위해 대공수사국의 부국장(2급)과 대공수사국장(1급)을 모두 조사했다. 그러나 검찰은 증거조작은 대공수사팀장인 이 처장이 주도했다고 판단했다. 우선 이 처장이 증거 제출을 위한 국정원 내부 ‘기획회의’를 주도했다는 관련자 진술이 있었다. 또 이 진술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검찰은 국정원의 비밀문서인 팩스전문과 함께 내부 결재시스템까지 모두 확인했다. 검찰은 최근까지 국정원 내에서 처장이 공문과 예산을 전결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어 범행을 이 처장이 주도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다만 처장 윗선인 대공수사국 부국장 등이 “전자결재로 전문을 확인 안 하고 클릭했다”고 진술한 것 등을 검찰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진상조사팀은 또 이 처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은 것은 “이 처장이 총책임자였으며 직접 범행한 것은 4급 과장들”이라고 설명했다. 총책임자인 이 처장을 불구속 기소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다. 검찰이 그동안 국정원을 압수수색한 것은 도청사건, 지난 대선 당시의 댓글사건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인데, 국정원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정치권에서 부실수사 논란이 제기될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검찰은 “사안마다 다르고, 입증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반박했다. 윤갑근 팀장은 “관련자가 두 차례 자살을 기도하고, 일부 소환자가 진술을 거부하는 등 수사상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라고 말했다.

○ 검찰총장 대국민 사과 뒤 감찰 지시


김진태 검찰총장은 수사 결과 발표 직후 대검찰청 8층에서 간부회의를 주재했다. 김 총장은 “사법 절차에 혼선을 초래하고,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검찰청 감찰본부는 이번 사건 수사와 공판에 관여한 검사들에 대한 감찰 조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증거조작 시비를 불러일으킨 검사 1, 2명에 대해 직무태만 등을 이유로 징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대공 사건의 수사 및 공판 문제를 분석해 수사 역량을 강화하고 증거수집 절차 등에 적법 시비가 없도록 새로운 업무 시스템을 마련하기로 했다.

한편 유 씨 측이 법정에 제출한 출입경 기록의 진위는 미궁으로 남게 됐다. 검찰은 유 씨가 제출한 문서가 위조라는 고발사건을 모두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로 재배당했다. 유 씨의 위증 혐의와 외국환거래법위반 혐의 등을 수사할 예정이며 유 씨가 검찰의 소환 요구에 불응하면 강제 구인도 검토하기로 했다.

정원수 needjung@donga.com·장관석 기자
#국정원#증거조작#전자결재#간첩사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