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인천 차이나타운 화장품전문매장 ‘휴띠끄’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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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企가 만들고 다문화여성이 팔고… “여기는 희망 부띠끄”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의 화장품 판매점 ‘휴띠끄’에서 판매원들이 중국인 관광객들의 손에 한국 화장품을 발라주고 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왕신 씨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의 화장품 판매점 ‘휴띠끄’에서 판매원들이 중국인 관광객들의 손에 한국 화장품을 발라주고 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왕신 씨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분명히 한국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만 들리는 곳. 밝은 조명 한구석에서 서른일곱 살 먹은 왕린(王琳·가명) 씨가 목청을 높이고 있다. 조막만 한 얼굴에 동그랗고 큰 눈. 곱게 화장을 한 그녀는 전형적인 한족 미인의 외모를 지녔다.

왕린 씨는 엄마 선물을 사러 왔다는 중국 옌타이(煙臺)대 여학생의 손등에 BB크림을 짜서 발라준다. 그러곤 ‘한국산 BB크림’의 우수성을 열심히 설명한다. 매장 안은 화장품을 사러 온 중국 학생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인하대 학생과 교직원들로 북적였다.

‘내 딸도 나중에 엄마에게 화장품을 사 줄까.’ 손님이 지갑을 꺼내는 사이 왕린 씨의 뇌리에 잠깐 아이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결혼 9년 차인 그녀는 2004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톈진(天津)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를 마친 후 조그마한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다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본격적으로 한국을 알고 싶어 황해를 건넜다.

왕린 씨는 여덟 살 된 딸, 12세 연상의 남편과 함께 인천 송월동의 작은 아파트에 산다. 처음 만났을 때 건축회사 현장소장으로 일했던 남편은 회사 사정이 나빠지는 바람에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요즘엔 경기가 나빠 일이 거의 없다. 왕린 씨가 버는 100만 원 남짓한 돈이 가족 수입의 전부다.

그녀는 지금 ‘휴띠끄’에서 일한다. ‘쉴 휴(休)’에 가게를 뜻하는 프랑스어 ‘부티크(Boutique)’를 합친 이름이다. 휴띠끄는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의 한중문화관 뒤쪽에 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이곳에선 한국말보다 중국말이 더 많이 들린다.

지하 2층, 지상 2층짜리 건물인 휴띠끄는 외국인, 그중에서도 중국인 관광객을 위한 화장품 쇼핑몰이다. 지하에는 사무실이 있고 1층에는 판매 공간이, 2층에는 체험장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이곳은 단순한 화장품 판매장이 아니다. 한국으로 시집온 중국 여성들과 인천 지역 중소기업들의 땀과 눈물이 모여 희망이란 열매를 가꾸어가는 ‘한중(韓中) 삶의 현장’이다.
한국에서 실질적 가장으로 살아가는 중국 여성들

휴띠끄에는 왕린 씨처럼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는 여성이 많다. 휴띠끄를 만든 인천시가 애초에 그런 사정을 가진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빈곤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결혼이주 여성들의 타향살이에 엄청난 삶의 무게를 더한다. 휴띠끄의 설립 취지는 결혼이주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 국적을 취득한 박서영 씨(35·가명)에게도 휴띠끄가 큰 힘이 되고 있다. 서영 씨는 한국에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바람을 피워대는 첫 남편과 이혼하고, 자신보다 열세 살이 많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 것이 2009년이었다. 남편은 먼저 한국에 와 있던 친언니가 소개해 줬다.

서영 씨에겐 열네 살 된 딸과 네 살짜리 아들이 있다. 딸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은 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았다. 화물차 운전기사인 남편은 통풍을 앓고 있어 장시간 운전이 어렵고, 당연히 벌이가 신통치 않다. 버는 돈의 대부분은 남편의 병원비와 약값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서영 씨가 휴띠끄에서 일하면서 그녀가 버는 돈으로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갈 수 있게 됐다.

돈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주말 근무를 할 때면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고민이다.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어요. 마땅히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중학생인 큰애가 동생의 엄마 노릇을 해 줘요. 한창 공부하고 친구들과 놀 때인데 동생을 돌보느라 집에만 있어야 하는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장 큽니다.”

2008년 10월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왕신(王新 ·28) 씨도 마찬가지다. 왕신 씨는 “나보다 열 살이 많지만 남편의 잘생긴 외모에 반해 결혼하게 됐다”며 “결혼 초기에는 의사소통이 어려워서 자주 싸우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섯 살이 된 아들과 넉넉하진 않지만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공사장에서 일용직 근로자로 일한다. 왕신 씨가 휴띠끄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남편 월급만으로 생활해야 했다. 방값과 생활비, 결혼 전 남편이 빌린 대출금을 갚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왕신 씨는 “남편의 벌이가 너무 적다 보니 돈을 함께 벌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며 “휴띠끄에서 일하면서 한 달에 20만, 30만 원 정도 저축할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왕신 씨는 한국 생활의 어려움으로 시댁과의 갈등을 꼽았다.

“시부모님을 중국의 친부모님처럼 모시고 살고 싶지만 시댁에선 저를 달가워하지 않아요. 명절에 시댁을 찾는데 투명인간 취급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혼수를 안 해왔다고 미움도 받았고요. 명절에는 2, 3일 동안 시댁 식구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데 말 한마디 안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휴띠끄에서 그녀는 경제적 자립의 길을 찾았고, 이곳의 동료들은 지치고 상처 입은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있다.
중소 화장품 업체들의 활로 찾아준 신천지

휴띠끄는 화장품을 만드는 인천지역 중소기업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무대다. 인천의 중소 화장품 업체들은 뛰어난 기술력으로 한국 화장품 산업 발전에 큰 공헌을 해 왔다. 지금도 내로라하는 국내 대기업들이 인천 중소기업이 만든 물건에 자기 회사 브랜드를 붙여 판다.

그렇지만 생산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계가 있었다. 대부분의 업체가 시장에 독자적으로 제품을 내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고, 자체 브랜드란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남의 물건’만 만들던 중소 화장품 업체들은 휴띠끄에 입점하면서부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됐다.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서울화장품은 더페이스샵과 스킨푸드 등 유명 브랜드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제품을 납품하는 업체다. 이 회사는 휴띠끄에 입점한 뒤 마침내 ‘히솝’이라는 자체 브랜드를 내걸었다.

“예전에는 자체 브랜드 제품을 만들어도 그것을 팔 곳이 없었어요. 우리가 직접 제품을 팔게 되니 자체 브랜드를 만들 수 있게 됐죠. 정말 기적이에요. 드디어 회사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잡게 됐어요.”

화장품 전문 제조업체가 모여 있다는 소문이 나자 전에는 보기도 힘들었던 외국인 바이어들이 직접 찾아오기 시작했다. 어떤 중국 바이어는 “물건이 마음에 든다”며 서울화장품 측에 네이멍구(內蒙古)에 있는 다른 거래처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역시 남동공단에 공장이 있는 랭키스는 휴띠끄 입점 전부터 전국의 피부관리실에 기초화장품을 납품하면서 인지도를 높이고 있었다. 하지만 수출 실적은 매우 미미했다.

휴띠끄에 매장을 낸 후 랭키스에는 중국 전역에서 수출 관련 제안이 온다. 중국 이외에도 홍콩과 대만, 러시아, 베트남 등에 거래처가 생겼다. 중국의 한 유명 화장품 업체는 랭키스에 OEM을 맡아줄 수 있느냐는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랭키스 관계자는 “토마토 꽃받침에서 추출한 특허 물질과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달팽이 점액이 들어가 있는 ‘미라클 물광 수분크림’이 특히 중국인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며 “용량도 300g으로 커서 고객들이 만족스러워 한다”고 말했다.

아직도 휴띠끄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많을 때는 월 매출이 1억3000만∼1억4000만 원 정도 되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올해는 개점 2년차를 맞아 입점 업체 수(현재 17개)와 제품 종류를 크게 늘릴 계획이다. 김창수 휴띠끄 본부장은 “내국인 고객 매출을 늘리고 해외 판로를 더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휴띠끄는? ::

인천시가 인천경제통상진흥원과 함께 만든 뷰티상품 전문매장. 2012년 11월 인천 중구 선린동 차이나타운 안에 있는 지하 2층, 지상 2층, 총면적 528m² 규모의 옛 건물을 단장해 문을 열었다. 이곳의 주요 목적은 화장품 및 미용제품 판매와 뷰티체험관 운영을 통해 인천지역의 화장품 제조 산업을 홍보하고 해외 바이어와 국내 중소기업을 연결해주는 것이다. 생활이 어려운 결혼이주 여성을 판매원으로 채용해 그들에게 경제적 도움도 주고 있다. 해외 관광객이 휴띠끄에서 물품을 사면 출국 때 부가세 면제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매장 운영은 인천지역의 화장품 관련업체 22곳이 참여한 인천헬스뷰티기업협회가 하고 있다.
인천=황수현 기자 soohyun8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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