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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토요판 커버스토리]“넌 선물이었어”

입력 2013-12-28 03:00업데이트 2013-12-2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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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애아 입양한 미국가정의 성탄절
1987년 서울 강남구 어느 동네의 처마 밑에서 모포에 싸인 채 발견된 조미혜(미국명 제이니·아래) 씨.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그를 보듬어 어엿한 성인으로 키워낸 엘리스 씨 부부의 연말은 따뜻했다. 포틀랜드=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 집집마다 성탄 장식을 꾸미고 있던 11일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 시의 한 2층 주택에서 한국계 여성으로 보이는 제이니 엘리스(27)가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온 제이니는 지금도 걸을 때 팔을 흔들며 심하게 뒤뚱거린다. 이 집에는 제이니 같은 한국 출신 장애인이 5명이다. 모두 마사하루 엘리스 씨(71)와 그의 부인 재닛 씨(63)가 입양했다.

제이니는 1987년 서울 강남 어느 동네의 처마 밑에서 모포에 싸인 채 발견된 아이였다. 길거리에서 버림 받은 중증장애아동을 치료하는 서울시립아동병원에 옮겨져 사경을 헤매고 있던 1989년. 누구도 입양하려 하지 않던 그를 먼 나라 미국의 엘리스 씨 부부가 가족으로 맞아들였다. 이 부부는 아들 토미(39)와 딸 션(35)이 있는데도 장애를 지녔거나 치료가 필요한 한국 아동들을 입양했다.

제이니 집안에 들어서자 그의 어머니는 “비디오 한 번 보실래요. 제이니를 처음 본 순간이에요”라며 아이의 출생의 비밀을 직접 꺼내 놓았다.

비디오 첫 화면에는 ‘조미혜’라는 제이니의 한국명이 선명하게 나왔다. 서울의 아동병원에서 힘겹게 움직이는 아이들과 이를 돕는 간호사들의 모습 속에 제이니가 보였다.

“세 번째로 입양한 에밀리(입양 당시 이름은 이수정·28)가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있던 때였어요. 혹시 우리가 또 보듬어야 할 장애아동이 있는지 홀트인터내셔널에 전화를 걸었지요.”(재닛 엘리스)

홀트인터내셔널의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금방 한국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비디오가 배달되었는데 보실래요”라고 물었다. 화면 속에 비친 제이니의 행동은 몹시 부자연스러웠지만 얼굴은 환한 미소로 가득했다. 엘리스 씨 부부는 그 미소를 보고 33개월 된 제이니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  

▼ 서지도 못하던 아이, 데려와 돌보니 정상생활 ‘기적’ ▼

처음엔 건강한 아이 입양 원했지만… 한국서 입양아동 서류 받아보니
모두 아프거나 장애 가진 아이들… 뼈 약한 골절장애 남매 눈에 들어와
헤어지지 않도록 함께 데려와 키워… 잘 커서 복지사-치료사로 일하죠


엘리스 씨 부부는 친자녀가 둘이나 있는데도 조미혜(미국명 제이니) 씨 등 치료가 필요한 아이 5명을 입양해 키웠다. 지난달 추수감사절에 가족 중 일부가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 줄 왼쪽부터 첫 번째로 입양된 캐리, 세 번째로 입양된 에밀리, 네 번째로 입양된 제이니 씨. 엘리스 씨 부부 제공
기자는 비디오를 시청하고 입양 과정을 듣는 동안 제이니가 옆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엄마에게 여러 번 들은 얘기라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11월 한국을 방문한 얘기를 꺼냈다. 홀트아동복지회 초청으로 엄마와 함께 24년 만에 처음 찾은 서울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은 그의 친부모를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류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 “당시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울먹였다.

“모든 것을 알게 돼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이제 편하게 (엘리스 씨 부부를) 엄마와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때 나를 받아주시지 않았더라면 전 굳은 채로 평생을 살았거나 하늘나라로 갔을지 모르죠. 매일매일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신 데 대해 너무 감사해요.”

깔끔하게 정리된 제이니의 2층 방에 올라가니 퍼즐과 많은 책들이 눈길을 끌었다. 혼자 이 공간에서 퍼즐을 맞추고 책을 읽으며 품었을 그의 꿈이 궁금했다. 그는 “에린(정지혜·27·엘리스 씨 부부가 다섯 번째 입양한 중증장애인)처럼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이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지금은 교회에서 유아들을 가르치며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먼 나라에서 입양한 장애아의 기적

취재를 위해 뉴욕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또 그들을 만나고 난 뒤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줄곧 머리에서 맴돌았다. 장애를 가진 아이 5명을, 그것도 먼 한국에서 굳이 입양할 생각을 왜 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처음에는 장애가 있거나 치료가 필요한 아이를 입양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건강한 아이를 원했죠. 하지만 1985년 처음으로 입양을 결정했을 때 한국에서 보내온 입양아 서류는 모두 장애가 있거나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이었어요.”(재닛 엘리스)

재닛 씨는 아이를 두 명만 낳고 그 이후엔 입양해 대가족을 꾸릴 계획을 결혼 전부터 갖고 있었다.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는 유행 같았던 현상이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마사하루 씨는 아내의 얘기를 흘려들었다. 하지만 아내가 둘째 딸 션을 출산한 1978년 이후 계속 입양을 원하자 1985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마사하루 씨는 처음에 일본에서 입양을 시도했지만 일본은 국제 입양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같은 아시아권에서 당시 가장 큰 입양아동 송출국이었던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 현지의 홀트인터내셔널을 통해 한국 입양아동의 서류들을 받았다. 그중 유독 한 남매가 눈에 들어왔다. 캐리(윤정순·32)와 크리스토퍼(윤성기·31) 남매였다. 이들이 따로 입양돼 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엘리스 씨 부부는 둘을 함께 집으로 데려왔다. 각각 6세와 5세였던 두 아이는 선천적으로 뼈가 약해 쉽게 부러지는 유전병인 ‘취약성 골절’을 앓고 있었다.

남편은 금융회사에서, 재닛 씨는 오랜 교사 생활에 이어 병원 등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보육비는 여유가 있었다. 장애아와 치료가 필요한 입양아의 치료비를 감당할 만한 좋은 조건의 의료보험에도 가입돼 있었다. 특히 포틀랜드에는 21세 이하는 조건만 되면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있었다. 재닛 씨는 이 정도면 이들을 키울 여건이 된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남편의 망설임이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교회의 한 모임에서 친한 사람에게서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갑자기 ‘그렇게 하라’는 하늘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믿으실지 모르겠네요. 순간 그것이 저의 소명이라고 깨달았죠.”(마사하루 엘리스)

마사하루 씨는 “당시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재닛 씨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도와주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족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는 뼈가 수시로 부러져 20세까지 17번의 골절상을 당했으며 누나 캐리는 이보다는 덜했다. 남매는 잦은 부상에도 정상적으로 성장했다. 캐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뒤 포틀랜드에서 장애아를 돌보는 사회복지사로, 동생 크리스토퍼는 알래스카 주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다.

첫 남매를 입양한 지 약 2년 뒤인 1988년 연말에 또 다른 기적을 경험했다. 1987년 겨울 척추 결핵에 걸려 설 수도, 걸을 수도 없었던 에밀리. 힘겹게 바닥을 기어다니며 외롭게 지내던 그는 그 다음 해에 새로운 가족과 함께 따뜻한 연말을 먼 나라 미국에서 맞았다. 에밀리는 검은 구두를 신고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채 그날의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에밀리는 입양되기 전 극도로 위험한 상황까지 몰렸다. 배변 기능이 악화돼 수술 없이는 2년 내에 전신마비가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 장애아 5명 품은 부부 “기적의 연속 지켜본 건 축복” ▼

모두가 거부하던 척추결핵 아이… 오랜 고민 끝에 입양해와 대수술
기적처럼 혼수상태서 깨어나 쾌유… 특별한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의
꽃피는 모습 곁에서 보는 특권… 우리 부부는 오래오래 누린 셈


서울시립아동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 엘리스 씨 부부에게 입양된 에밀리가 대수술을 받은 뒤 가족과 첫 연말을 맞았던 1988년 당시 모습(왼쪽 사진). 심각한 뇌성마비 장애를 앓아 왔던 에린(오른쪽 사진의 왼쪽)은 2년 전 특수 휠체어를 탄 채 그를 돌보던 사회복지사와 기적 같은 결혼에 골인했다. 엘리스 씨 부부 제공
미국 오리건 주 유진 시 홀트인터내셔널의 사회복지사 두 명이 병원의 요청으로 급하게 한국으로 날아갔다. 이어 치료가 필요한 6명의 장애 입양아 파일을 들고 돌아왔다. 5명은 가족을 찾았지만 에밀리는 끝까지 아무도 거두려 하지 않았다. 그의 입양을 추진하기 위해 홀트 측이 1987년 12월 유진 시에서 개최한 설명회에 엘리스 부부가 참석했다. 재닛 씨는 ‘이 땅의 모든 아이는 자신의 집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홀트 창립자 해리 홀트의 문구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이번에는 남편의 반대가 생각보다 심했다. 마사하루 씨는 “이 아이를 입양하면 우리 가정에 큰 먹구름이 몰려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지나고 보니 아내의 결정이 맞았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그는 매일 교회를 찾아 어떻게 해야 할지 응답을 구했다고 했다. 오랜 기도 끝에 ‘받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었다.

1988년 4월 19일 생후 30개월이던 에밀리는 엘리스 씨 부부의 집으로 왔고, 한 달 뒤에 대수술을 받았다. 상태가 악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확신이 없는 수술이었다. 많은 친구들과 이웃들이 쾌유를 기원했다. 며칠 뒤 기적처럼 에밀리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수술 후 에밀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가 고교를 졸업한 뒤 직장을 찾고 있다.
출생의 비밀과 ‘가족’을 키운 특권

인터뷰 내내 “희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부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입양한 에린을 키우는 데는 힘이 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6세에 입양된 에린(27)은 에밀리와 제이니보다 훨씬 더 심한 중증 뇌성마비 장애를 앓고 있었다. 팔을 심하게 꼬았으며 목 아래 부위의 근육을 지탱할 수 있는 의료장비를 수시로 갈아줘야 했다. 재닛 씨는 “청소년이 되면서 몸이 커지니까 옷을 입히고 화장실이나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을 챙기기에 힘이 부쳤다. 은퇴한 남편이 에린을 돌봤다”고 말했다.

에린에게도 절체절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화장실에 있던 에린의 의료장비가 갑자기 고장 나면서 발작을 일으켰다. 응급실로 실려가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더이상 돌볼 수 없다고 생각한 부부는 에린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중증장애인 전용 아파트에 보냈다. 사회복지사 등 보조원들이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을 도와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에린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남편을 만났다. 에린의 생활을 도와주던 사회복지사와 2011년 7월 결혼해 현재 분가해 살고 있다. 에린은 지금도 목 위만 움직일 수 있는 특수 휠체어에 의지해 지낸다.

엘리스 씨 부부가 5명의 한국 입양아를 키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장애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청소년기를 맞아 자아에 눈을 뜨면서 자신의 출생 비밀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학업도 게을리하고 방황하던 시기에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그 시기를 넘기고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한 2011년 엘리스 씨 부부와 7명의 자녀는 처음으로 함께 하와이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네 번째로 입양된 제이니는 ‘가족의 완성’을 확인한 그 여행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취재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오니 한 통의 e메일이 와 있었다. 기자가 인터뷰 내내 ‘이해하기 어렵다. 왜 그런 희생을 자처했느냐’에 대한 답을 요구했던 탓일까.

“나는 장애아를 입양했다고 느끼지 않아요. 이들도 똑같은 가정을 가져야 할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줬으면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줬으면 해요. 특별한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과 가정을 이루면서 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우리 부부는 오히려 누렸다고 생각합니다.”(재닛 엘리스)  

▼ “세살 아들이 찾는 쌀밥 지어주려 전기밥솥도 샀죠” ▼

근육장애 가진 아이 보려 서울행
위탁모의 “네 엄마 아빠다” 말에… 부부 “그래, 키워보자” 굳은 다짐
입양건강센터 문 연 소아과 의사 “1970년대 한국 보육원 방문때 치료방치 장애아 보고 큰 충격, 그때부터 입양 주선하겠다 결심”


끝내 딸아이의 이름은 공개하지 말아 달라던 브라이언 오핑거 씨(오른쪽)가 딸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환하게 웃고 있다. 입양 당시 근육이 발달하지 못해 제대로 앉지도 못하던 딸은 이제 완쾌됐다. 딸을 볼 때마다 환하게 미소짓는 그는 ‘딸 바보’였다. 필라델피아=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미국에서 한국 장애아동을 입양한 가정은 생각보다 많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신체 건강한 아이들은 한국에서 대부분 입양이 되기 시작했다. 자연히 미국 가정이 한국에서 입양할 수 있는 아이들 가운데 장애아의 비율이 높아졌다. 입양 수요는 여전한데 비장애 아동의 수가 줄면서 장애아동의 입양을 선택해야 하는 미국 가정이 늘어난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도심에 사는 브라이언 오핑거 씨(34)도 비슷한 사례다. 오핑거 씨 부부는 2011년 9월 5일(노동절)을 잊지 못한다. 그해 3월 서울의 한 위탁가정에 있던 여자 아이를 입양해 올 때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이날 일어났다. 딸은 근육이 발달하지 못해 일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든 긴장감퇴증세(Low muscle tone)를 갖고 있었다. 또 이른 시기에 청력을 잃을 수도 있는 CMV 바이러스에 노출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생후 20개월 만에 보란 듯이 일어섰다.

이달 4일 필라델피아아동병원에서 만난 오핑거 씨의 딸에게서는 아무런 이상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오핑거 씨가 2010년 10월 현지 입양기관이 건네준 입양 서류를 접할 당시 입양 결정의 가장 큰 걸림돌은 신체적 이상이었다. 필라델피아아동병원 국제입양건강센터의 디렉터였던 애비게일 파버 박사와 입양 후 감당할 수 있을지, 어떤 치료가 필요할지를 상의했다. 아내가 변호사였고 자신도 의료기기 업체에서 일했던 만큼 치료비는 충분히 부담할 수 있었다. 상의 후 내린 결론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신체적 이상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입양 후 6주간 집중 치료를 받았고 이듬해 4월까지 후속 치료가 이어졌다.

“2010년 초겨울 서울을 찾아 딸아이를 처음 보던 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두렵고도 설레는 날이었어요. 하지만 곧이어 내가 아빠가 되고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벅찼죠. 몇 년 전 장애인을 돕는 여름캠프에서 자원 봉사를 하면서 장애인을 돌보는 데 얼마만큼의 노력이 들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한 그림을 갖고 있었던 게 도움이 되었어요.”

‘그래도 입양 결정이 어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오핑거 씨는 “우리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장애를 갖고 태어날 수 있지 않느냐. 오히려 미리 어떤 이상이 있는지를 알고 대처할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다만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꼭 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나날이지만 딸이 나이가 들어 입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고통받을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입양은 희생이 따르는 긴 여행”

언어장애와 잘 일어서지 못하는 긴장감퇴증세를 앓고 있는 벤을 지난해 입양한 호프먼 씨 부부. 성탄을 반기는 각종 장식을 해둔 이들은 가족을 이뤘다는 축복에 감사하는 모습이었다. 트렌트=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필라델피아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 뉴저지 주 트렌트 시의 호프먼 씨 부부도 지난해 11월 남자 아이인 벤(3)을 서울에서 입양했다. 지난해 1월 입양기관을 통해 사진으로 본 벤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입양기관 측은 비장애아의 입양엔 여러 해가 걸릴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장애를 갖고 있거나 신체적인 이상이 있는 아이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이들은 수락했다.

호프먼 씨 부부는 지난해 11월 다른 가족 두 명과 함께 처음으로 벤을 보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벤은 언어발달 장애와 근육이 약해 제대로 설 수 없는 긴장감퇴증세를 앓고 있었다. 위탁가정의 문을 여는 순간 위탁모는 벤에게 “너의 엄마와 아빠다”라고 말했다. 이 말 한마디에 호프먼 씨 부부의 걱정은 ‘그래 키워보자’는 다짐으로 바뀌었다.

내년에 네 살이 되지만 아직도 벤은 ‘대디’ ‘마미’ 같은 몇몇 단어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2주일에 한 번씩 언어치료사가 그의 집을 방문한다. 며칠 전 크리스마스이브 때는 필라델피아아동병원에 들러 얼마나 치료에 진전이 있는지 살펴봤다. 벤은 미국에 온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서울에서 ‘엄마’로 불렀던 위탁모를 잊지 못해 밤에 운다고 한다. 호프먼 씨 부부가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이다. 벤이 항상 찾는 하얀 쌀밥을 지어주기 위해 한국 식품점에 들르고 최근에는 전기밥솥까지 구입했다.

“근처에 프린스턴대가 있는데 거기에 한국 학생들이 많습니다. 우리 아들도 언젠가는 저들처럼 훌륭하게 성장해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벤이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한국 문화와 한국어도 열심히 가르칠 생각이고요.”

호프먼 씨 부부와 오핑거 씨 부부는 필라델피아아동병원 국제입양건강센터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센터를 13년 전 처음 연 애비게일 파버 박사는 “장애아동을 입양하는 미국 가정들은 각각 다른 입양 이유와 사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입양이 성공하기 위해선 철저한 사전 준비와 다짐이 필요하고 입양 후 상당 기간은 특별한 관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20년 동안 소아과 의사로 일했으며, 당시 장애아동의 입양을 주선하는 입양기관 관계자들과 함께 한국 등 아시아 국가의 보육원 등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70년대 후반 한국의 한 보육원을 방문했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장애가 심각한 아이가 있었는데 한국 의사들이 어떻게 치료할지를 알고도 손을 놓고 있었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의사들은 ‘한국 정부에 이들은 우선순위가 아니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파버 박사는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돌볼 곳 없는 장애아동들을 위해 다른 나라에서 이들을 원하는 부모가 있다면 연결해 주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2년 전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30년 전에 장애아를 입양한 부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시 파버 박사의 도움을 받았던 입양아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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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그 애가 처음 미국으로 왔을 때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귀 하나가 없었고 당장 심장수술을 받아야 했죠. 아이를 입양하려던 부모는 이 내용을 몰랐기 때문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래도 입양하겠느냐’고 했더니 ‘그 아이는 내 딸이다’라고 하더군요.”

그 아이가 어엿하게 성장해 결혼까지 한다는 말에 파버 박사는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하지만 장애아를 입양하는 부모들은 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고통과 사랑으로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찌 보면 ‘모험’ 같다고나 할까요. 아니네요. 모험은 즐거움이 동반되는 것이죠. 고통과 희생이 따르는 ‘긴 여행’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2013년이 저물어가는 즈음에 만난 이들로 인해 기자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장애아를 입양한 가족들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감동과 축복을 누리고 있다고.

포틀랜드·필라델피아=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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