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방송-문화계 남성 5인 “나에게 이소룡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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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짓눌린 욕망의 분출통로… 강한 남자의 판타지였다

김태훈(44·팝칼럼니스트)

초등학교 때 비디오를 통해 이소룡의 영화를 알게 됐다. 1980년대는 아파트촌을 중심으로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가 보급되던 시기였다. 당시 불법 복제본이 많이 돌았는데 남자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게 이소룡의 영화였다.

영화를 다 챙겨 봤지만 그가 죽었다는 것은 꽤 뒤에 알았다. 이소룡의 영화를 보면서 사춘기 남자 아이들은 남성성을 확인했다. 강해지고 싶은 욕구를 이소룡이라는 판타지를 통해 해소한 것 같다.    
    
    
    
    
천명관(49·소설가)

내 또래 세대에게 이소룡은 슈퍼 히어로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것은 동양인으로서의 ‘열등감’과도 닿아 있는 것 같다. 한창 활동하던 시절 이소룡은 아시아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당시 인기 있었던 폴 뉴먼, 말런 브랜도와 비교하면 키도 작고 연기했던 캐릭터도 단순했다. 하지만 멋진 스타일을 보여줬다. 그처럼 육체성이 강조된 히어로는 이소룡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만한 인물은 없었다. 지금도 다들 이소룡을 흉내 내는 것을 보면.
    
    
    

장동민(34·개그맨)

고등학교 때는 가방에 절권도 관련 서적만 가지고 다녔고 대학 시절엔 이소룡이 그려진 옷이나 차이나풍 도복을 입고 다녀서 사람들이 ‘소룡 씨’라고 불렀다. 내 모든 아이디는 이소룡의 영어 이름인 ‘Bruce’로 시작한다. 슈퍼맨은 외계인이고 배트맨에겐 고가의 장비가 있으며 스파이더맨은 변종이지만 이소룡은 순수한 인간이다. 무도인이자 철학자로서도 그는 출중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의 삶을 동경한다. 단 하루라도 이소룡처럼 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임진모(54·음악평론가)

잠재됐던 그 세대 감성의 폭발을 상징하는 이가 이소룡이다. 요즘 아이들이 아이돌 그룹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정무문’이 개봉한 해에 초토화되듯 한결같이 그에게 넘어갔다. 당시 중학교 교실에서는 쌍절곤 흔들고, 절권도를 흉내 내는 아이들과 그들이 내는 ‘아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무문은 진짜 싸움 같았다. 액션에 촉과 날이 있었다. 굉장히 ‘레알(real)’이었다. ‘정무문’ ‘당산대형’ ‘맹룡과강’ ‘용쟁호투’. 당시엔 네 편의 이소룡 출연 영화 제목을 못 대면 그는 대중문화를 이해 못 하는 사람이었다. 대중문화로 가는 교과서 역할을 했다. 이소룡 때문에 잡지를 사게 됐고, 그림을 그리게 됐으며 그림을 그릴 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음악을 만났다.
    
    
    

유하(50·영화감독)

초등학교 5학년 때 재개봉관에서 이소룡의 ‘정무문’을 처음 봤다. 얼마나 여러 번 상영한 필름인지 화면에는 비가 내렸고 심지어 마지막 장면은 잘려 있었다. 하지만 이소룡은 너무 강렬했다. 버스비를 아껴서 이소룡 영화를 보러 다녔다. 반 친구들 절반 이상이 이소룡의 팬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짓눌린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이소룡이었다. 그의 비장미 넘치는 액션은 유신시대의 음울한 분위기와도 어울렸다. 절권도 고수의 액션은 화려하진 않지만 진실을 담고 있었다. 이소룡 시대가 저문 뒤 1980년대 청룽의 시대가 왔다. 나와 같은 이소룡 팬들은 청룽을 좋아할 수 없었다. 청룽은 이소룡에 비하면 너무 경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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