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기현]역대 대통령의 과거사 개입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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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채널A 정치부 차장
김기현 채널A 정치부 차장
2006년 12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정상진 옹을 만났다. 러시아 연해주 출신, 광복 후 소련군으로 북한에 진주해 김일성 정권 수립을 도왔고 문화성 부상(副相·차관)까지 지냈던 그는 1950년대 숙청의 칼날을 피해 소련으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옛 소련 지역에서는 유성철 전 북한군 작전국장, 강상호 전 내무성 부상, 장학봉 전 북한군 군관학교장 등 정 옹 같은 북한 고위층 출신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남한이 6·25를 일으켰다’는 북침(北侵) 주장이 허구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며칠 전 이 그룹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정 옹마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사회도 이미 6·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다수를 차지한 지 오래다. 이틀 전 박근혜 대통령이 “6·25가 북침”이라고 대답한 고교생 대상 설문조사 결과를 언급하면서 역사 왜곡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한편에선 요즘 청소년들은 북침을 ‘북한의 침략’의 줄임말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박 대통령이 ‘오버’한 거 아니냐는 반응도 나온다. 박 대통령으로선 올해 63주년이 되도록 6·25를 둘러싼 논란이 정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 답답했을 것이다.

문제는 역대 대통령까지 이 논란에 가세해 갈등을 더욱 키웠다는 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신라, 고려의 통일은 성공했지만 6·25는 성공하지 못했다”며 6·25를 ‘통일전쟁’으로 규정했다. 통일을 위해 불가피하게 무력을 사용했다는 통일전쟁론은 남침 사실을 뒤늦게 ‘인민해방전쟁’으로 정당화하려는 북한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6·25는 ‘전면적 내전’이라는 시각을 드러냈다. 내전(內戰)론은 “38도선을 사이에 둔 크고 작은 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선 얼버무리면서 주어를 뺀 채 “남북 사이에 전쟁이 시작됐다”고 서술하는 식이다.

6·25에 대해서뿐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은 과거사에 관심이 많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제2의 건국 선언’에 이어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과거사 문제에 개입했다. 대통령과 총리실 산하에 10개가 넘는 각종 과거사 위원회를 만들어 수천억 원의 예산을 써가며 과거사 파헤치기를 했다.

‘실용’을 내세운 이명박 전 대통령마저 2008년 8·15 경축 키워드를 ‘건국 60주년’으로 잡으면서 “8·15는 광복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반대 세력의 비판을 받았다. 이처럼 대통령이 직접 과거사 문제에 개입하려 할 때마다 부작용과 국론 분열만 일어났던 것이다.

더욱이 분단 상황에서 동시대를 섣불리 재단하는 것이 공정할 리가 없다. 독일도 통일 후 옛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문서보관서에 있던 극비자료가 공개되면서 “현대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사실들이 새로 드러났다. 시위 학생을 총으로 살해해 거센 반정부 운동을 불러왔던 서독 경찰관과 진보 지식인 행세를 하던 인사가 슈타지의 간첩이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이번 ‘역사 왜곡 시정’ 발언에 대해 당장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역사 왜곡은 참을 수 없다면서 헌정 문란으로 국기가 흔들리는 현실 왜곡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느냐”며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과 묶어 공격했다. 대통령의 역사에 대한 언급이 정치공방의 빌미가 된 것이다. 박 대통령 자신도 대선 당시 5·16, 유신 등 과거사 인식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박 대통령은 6·25 관련 발언을 한 이날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 18명을 임명했다. 그러나 민감한 역사인식 문제를 건드리면서 동시에 대통합 행보를 하긴 쉬워 보이진 않는다. ‘역사 왜곡’에 대한 박 대통령의 우려가 이해는 된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통령이 앞장서는 과거사 전쟁을 다시 보게 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김기현 채널A 정치부 차장 kimkihy@donga.com
#대통령#과거사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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