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올해는 조금 더 가볍게 길을 떠나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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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넘은 세 문인이 내놓은 따뜻한 신년 에세이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고원에 위치한 소금 호수. 자연이 만드는 거대한 천연 염전을 접한 소설가 박범신은 “비와 바람과 햇빛과 시간이 섞여 만들어 내는 자연의 신비한 광합성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맹그로브숲 제공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고원에 위치한 소금 호수. 자연이 만드는 거대한 천연 염전을 접한 소설가 박범신은 “비와 바람과 햇빛과 시간이 섞여 만들어 내는 자연의 신비한 광합성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맹그로브숲 제공

살아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부모가 세상을 뜬 뒤에야 그들의 부재로 인한 아린 그리움을 깨닫게 되고, 아이를 낳아봐야 내리사랑의 의미를 알게 되는 식이다. 이런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온다. 후회도 반복된다. 사람들은 실수를 줄이기 위해 타인의 삶을 살펴본다.

예순이 넘은 남성 작가 세 명이 나란히 새해 들어 에세이를 펴냈다. 시인 정호승(63)과 김용택(65), 소설가 박범신(67). 문단의 중심에 선 작가들이지만 이들이라고 삶의 회환과 뒤늦은 깨달음이 없으랴.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로 귀결되는 듯하다. ‘비워낼수록 채워진다.’ 올해는 조금 가벼운 짐을 지고 길을 나서면 어떨까.

재작년 한여름 밤. 서울 인사동에서 정호승 시인과 술자리를 가졌다. 밤이 깊어가도 그의 온화한 미소는 변하지 않았으며 목소리는 내내 잔잔했다. 그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밤이었다.

정호승의 에세이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비채)를 읽다보니 그 여름밤 시인의 미소가 다시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가 2006년 펴낸 에세이 ‘내 인생의 힘이 되어준 한마디’가 30만 부를 넘기며 큰 사랑을 받은 것도, 글 속에서 그의 미소를 그려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신작 에세이에는 76개의 이야기가 있다. 시인이 읽은 글과 지인들과의 만남을 비롯한 여러 경험들이 잔잔히 펼쳐지는데, 놀라운 것은 시인의 비범한 시각이다. 이를테면 ‘문’과 ‘벽’에 관한 얘기는 이렇다. 영화 ‘해리포터’를 보다 소년 해리가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벽을 뚫고 가는 장면을 본 시인. 벽이 문이 되는 장면을 보고 그는 ‘모든 벽 속에는 문이 존재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인은 단언한다. 인생의 각종 고난이 벽처럼 서있지만 “문 없는 벽은 없다”고.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자신이 나고 자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의 정겨운 삶을 산문으로 옮겨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에 출간한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문학동네·총 8권)는 ‘내가 살던 집터에서’ ‘살구꽃이 피는 마을’이란 신작 에세이 2권에 먼저 펴낸 에세이 6권을 보탠 것이다.

‘내가 살던 집터’에서는 ‘양용기 할아버지’ ‘풍언이 양반’ ‘광주댁’ ‘정수네 집’ 등 진메마을 집들의 내력을 다큐멘터리처럼 기술해나간다. 비슷비슷한 집안 내력이 이어져 좀 지루하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살구꽃이 피는 마을’이 나을 듯하다. 시인의 유년기가 주로 펼쳐지는데 부엌에서 갑자기 먹구렁이가 나오거나 학교에서 나눠준 우윳가루를 집에 가져와 쪄먹었던 1950년대 중후반 농촌 풍경이 정감 있게 그려진다.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을 떴다. “농경사회 속 오래된 공동체의 파괴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나는 무너져가는 한 작은 마을의 시인이었다. 이제 나는 그 마을 밖으로 유배되었다.”

2010년 한 달 일정으로 터키를 다녀온 소설가 박범신은 동서양이 만나는 터키의 문화를 접하고 깊은 감흥을 받았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그는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터키를 꼽는다. 그의 에세이 ‘그리운 내가 온다’(맹그로브숲)에서는 이국땅에서 느낀 삶과 문화, 종교에 대한 단상들이 감각적인 사진들과 어우러진다.

박범신은 여행을 통해 ‘꿈을 꿀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새 우리는 목표와 꿈을 하나로 보는 쩨쩨한 수준에서 희망을 말한다.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가리키는 목표를 꿈과 일치시키는 버릇은 우리를 쩨쩨하게 만들 뿐이다.” 거대한 타임캡슐 같은 이스탄불을 지나, 고대도시 케코바 앞바다에 이른 박범신은 이렇게 읊조린다. “우리가 스스로 자연이라는 걸 인식하고, 저 자연 속에 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에 애달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주입해 준 욕망을 내려놓는 것만큼 자연이 우리에게 가까워집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정호승#김용택#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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