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性교육’이 답이다]<上> 사실상 손놓은 학교 교육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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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 시간? 자거나 자율학습… ‘학생 만족도’ 고작 27%

《 “성교육요? 1시간 내내 PPT(파워포인트) 자료 베껴 적으면 끝이에요. 선생님은 한 시간 내내 앉아서 끝나는 종 울리기만 기다리던데요.” 서울 A중학교 2학년 김모 양(14)은 10일 “성교육은 사실상 자율학습 시간”이라며 평소 가졌던 불만을 거침없이 털어놨다. 김 양은 “슬라이드엔 남녀 생식기관 이름과 기능만 나열돼 있는데 1학년 때 이미 배웠던 내용이라 성교육 시간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많고 선생님도 별로 ‘터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 왜곡된 성 관념 방치하는 성교육

현재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는 성교육 내용은 남녀 신체구조 차이나 피임법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초중고교를 통틀어 성폭력 예방법이 포함된 교과과정은 4개, 음란물 중독 대처법이 포함된 교과과정은 3개뿐이다. 최근 빈발하는 아동 성범죄를 다룬 교과는 아예 없다. 중학교 1학년 기술가정 교과서는 성충동 대처법에 대해 “성 에너지를 취미활동 등으로 승화시켜 발전 기회로 삼는 것이 좋다”고 설명하는 수준에 그쳤다. 체육 교과서에 소개된 성충동 대처요령도 “남성은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 등의 추상적 내용이 전부다.

고2 여학생은 “정말 알고 싶은 건 ‘어떻게 하면 성폭행을 당하지 않을지’인데 남녀 신체구조 같은 다 아는 내용만 다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중3 여학생은 “성교육 시간에 배운 대로 ‘싫어요’라고 외친다고 도망가는 성폭행범이 어디 있겠느냐”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본보 설문 결과 학교 성교육에 만족한다고 답한 초중고교생은 78명(27.3%)에 불과했다.

성교육이 제 역할을 못하는 사이 학생들은 왜곡된 성 관념에 물들고 있었다. 설문에 응한 남자 고교생 100명 중 40명은 아동 청소년이 등장하는 음란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고 답했고 이들 중 아동 음란물을 본 뒤 ‘성욕이 생겼다’는 학생은 18명(45%), ‘따라 해보고 싶다’고 한 학생은 10명(25%)이나 됐다. 고2 남학생 2명은 “성범죄를 예방하려면 여성들이 밤에 짧은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며 성폭행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성범죄자의 왜곡된 논리를 당당하게 주장했다.

지난해 성폭행 가해자의 79.2%는 고졸 이상 학력이다. 32.9%는 대학까지 나왔다. 성범죄자들이 나주 사건 가해자 고종석(23)처럼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성범죄자 대부분이 정규교육을 받았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학력이 높아도 학창시절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하면 성범죄 억지능력을 얻지 못한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 부족한 교육시간, 전문성 없는 교사

동아일보가 5일 설문조사한 서울 시내 중고교 4곳은 정부가 정한 연간 성교육 의무시간인 10시간을 모두 채웠다고 신고했지만 정작 학생들은 ‘우리가 언제 그런 수업을 들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본보 설문에 응한 학생 285명이 체감한 성교육 시간은 한 해 평균 1.7시간에 불과했다.

현재 대부분의 학교에는 성교육만 전담하는 교과 수업이 없다. 과학이나 기술가정 등 일반 교과에 ‘임신과 출산’ ‘이성 교제’ 등 성교육 관련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을 뿐이다. 일반 교과에 포함된 성교육 관련 내용을 가르치고 이를 성교육 시간으로 계산하고 있다.

여러 교과에 분산된 내용을 각기 다른 교사가 가르치다 보니 학생들은 비슷한 수업이 반복된다는 불만이 많다. 현재 성교육 관련 교과목은 기술가정 도덕 체육 과학 사회문화 등이다. ‘신체의 구조·변화’ ‘성 역할 및 성평등’ 등의 항목은 초중고에 걸쳐 9번이나 비슷한 내용을 배운다.

현재 성범죄나 성매매 예방 등 성교육 내용이 통합적으로 담긴 교과는 보건 과목이 유일하다. 하지만 보건 교과를 채택한 중고교는 전국 5441곳 중 7.8%인 427곳에 불과하다.

보건교사가 아닌 일반 과목 교사가 성교육을 하는 대다수 중고교의 경우 수업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많다. 성교육 연수나 아동간호학 등 성교육 관련 학문을 배우지 않은 교사들이 태반이기 때문. 용인의 한 남자 고교 A 보건교사(41·여)는 “성교육 연수를 한 차례도 받지 않은 교사들이 찾아와 ‘아이들에게 콘돔 끼우는 법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며 묻고 간다”고 말했다. 한 중학교 보건교사는 “성교육 지식이 부족한 교사들이 손가락이나 오이로 콘돔 사용법을 대신 보여주는 비교육적인 현상도 일어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요즘처럼 청소년들이 음란물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황에선 성교육 전문강사를 늘리고 성폭력에 대한 정확한 인지교육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명화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장은 “성교육은 성폭력의 명확한 범위를 이해하게 해주고 남녀 관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김진우 기자 uns@donga.com  
#성교육#만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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