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딸 2003년까지 北에 생존”… 4년간 요덕수용소에 함께 갇혔던 탈북자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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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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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20일 작곡가 윤이상이 신숙자 씨의 남편 오길남 박사에게 ‘다시 북으로 넘어오라’며 가족의 육성이 담긴 카세트테이프와 함께 동봉해 보낸 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신 씨, 딸 혜원 씨, 규원 씨. 동아일보DB
1991년 1월 20일 작곡가 윤이상이 신숙자 씨의 남편 오길남 박사에게 ‘다시 북으로 넘어오라’며 가족의 육성이 담긴 카세트테이프와 함께 동봉해 보낸 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신 씨, 딸 혜원 씨, 규원 씨. 동아일보DB
“혜원, 규원이가 아직도 꼭 살아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통영의 딸’ 신숙자 씨(69)와 딸 혜원(35) 규원 씨(33) 모녀가 2003년까지 생존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5일 경기 수원시에서 만난 탈북인 김기철(가명·46) 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91년부터 4년간 요덕수용소에서 신 씨 모녀와 함께 생활했고 2003년까지는 소식을 확인했다”며 “내 증언이 북에 남은 가족을 위태롭게 할 수 있지만 신 씨 모녀 생환 운동에 도움이 되고 싶어 입을 열었다”고 말했다.

신 씨 모녀는 1985년 남편 오길남 박사(69)와 독일 유학 중 북한에 납치됐다. 오 박사는 1986년 11월 북한을 빠져나왔지만 신 씨는 다음 해 평안남도 요덕수용소에 갇혔고 1991년 음성 편지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김 씨는 1991년 겨울 요덕수용소에서 신 씨를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국군 포로 아들로 태어나 차별과 냉대를 받으며 자란 김 씨는 11년간 군 생활을 마친 뒤 탄광으로 가라는 명령에 불복해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다. 김 씨는 수용소에서 오리 닭 등을 키우는 가축농장을 맡았고 이곳으로 일을 나온 신 씨와 알게 됐다. 김 씨는 “신 씨는 늘 멍한 상태로 ‘죽고 싶어도 딸 때문에 죽을 수 없다’고 읊조렸다”며 “몸이 아파 물가에 노는 오리들을 지켜보는 일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탈북인 김기철(가명) 씨가 ‘통영의 딸’ 신숙자 씨 모녀 사진을 가리키며 신 씨 모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탈북인 김기철(가명) 씨가 ‘통영의 딸’ 신숙자 씨 모녀 사진을 가리키며 신 씨 모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당시 26세이던 김 씨는 막내 동생뻘인 혜원 규원 씨와 깊은 정을 쌓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독일에서 온 혜원이와 규원이는 늘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며 “이북에서는 친남매가 아니면 아저씨라 부르는데 오빠라고 부르니 더 친밀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아픈 신 씨를 대신해 집안일은 늘 어린 자매 몫이었다고 김 씨는 전했다. 김 씨는 “자매가 거적때기만 걸친 채 발에 맞지 않는 노동화를 신고 물을 길으러 가고 땔감을 구했다”며 “불이 잘 붙는 마른가지를 구해주려고 자매 대신에 (내가) 산에 오르기도 하고 물지게를 몸에 맞게 고쳐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신 씨 모녀는 수용소 생활과정에서 북한으로 오 박사를 다시 불러들이려는 북한 당국에 갖은 고초를 겪었다고 김 씨는 전했다. 김 씨는 “당시 (오 박사를 다시 부르기 위한) 신 씨 모녀의 편지와 사진은 모두 북한이 연출한 것”이라며 “억지로 쓴 편지 안에는 오 박사가 속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1994년 수용소를 나온 뒤 수용소 안과 밖 소식을 전해주는 일을 보위부 몰래 하며 살았다. 김 씨는 “1년에 두 차례 수용소를 찾을 때마다 잘 아는 보위부 지도원에게 신 씨 모녀 소식을 물었다”며 “잘 살아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용하다, 죽지 않고 살아만 있어라’라고 응원했다”고 말했다. 1995년 신 씨 모녀는 종신구역으로 옮겨졌고 2003년까지는 살아 있었다고 한다. 김 씨는 아버지가 숨진 뒤 2006년 가족과 함께 탈북했다.

김 씨는 “명절 때만 되면 혜원이와 규원이 생각이 더 난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풍족하게 살았던 자매가 명절마다 더 간절히 아버지와 독일 생활을 그리워했기 때문.

김 씨는 “두 자매가 (수용소) 종신구역에서도 10년을 버틸 정도로 의지가 강했는데 이후 10년을 더 버티지 못했겠느냐”며 “한국이 죄 없이 갇힌 자매의 생환을 위해 발 벗고 나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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