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동창이 수십 차례 내지른 회칼에 찔려 숨진 이모 씨(47)를 대신해 이 씨의 형이 재판장에게 거듭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이 씨의 형은 동생을 회칼로 33차례 찌른 유모 씨(47)를 옹호하던 유 씨의 아내에게 욕을 하다가 법정에서 내쫓긴 터였다. 이 씨의 여동생은 유 씨의 아내를 향해 신발을 내던지기도 했다. 이 씨와 그 형제자매의 한(恨)이 풀린 밤이었다.
○ 참혹한 죽음
이 사건은 올해 3월 31일 오전 11시 25분 발생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호프집에서 30년 지기이자 동업자인 고교 동창 이 씨를 살해하고 경찰에 붙잡힌 유 씨가 내뱉은 말이다. 이 씨는 차마 보기 힘든 모습으로 숨졌다. 흰 셔츠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
유 씨 발언은 그대로 인터넷으로 번져나갔다. ‘죽을 짓만 골라서 하다 죽은 것은 동정할 수 없다. 법의 온정을 기대한다’ ‘당장 유 씨를 풀어줘라’ ‘스스로 무덤을 팠다’ ‘조폭 같은 놈 잘 죽었다’라는 댓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이 씨를 잃은 슬픔에 더해 날아든 누리꾼의 조롱은 유족에게는 비수가 됐다.
○ 극적인 반전(反轉)
20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 굳은 표정의 김민아 검사가 국민참여재판에 참석한 배심원단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누구도 저런 모습으로 죽을 이유는 없습니다. 피해자는 죽어 말도 못합니다. 그가 남긴 건 갈기갈기 찢어진 자신의 몸뿐입니다. 한 생명이 저런 비극적 죽음을 맞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김 검사는 이 씨 죽음의 실체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 씨가 칼에 찔릴 당시 폐쇄회로(CC)TV 장면을 재생했다. 유 씨가 저항하는 이 씨 배에 미리 준비해 온 회칼을 찍어 댔다. 숨진 이 씨 앞에서 유유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다가오자 이 씨 배에 다시 한 번 회칼을 꽂았다. 방청석은 수군거렸다. 이 씨의 누나가 통곡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 씨가 말했다. “이 씨와 함께 한 온천사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이 씨가) 온천 인수 건이 무산되면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해 정신적 고통을 받아 그를 죽였다.”
그러자 검사는 즉각 유 씨의 계좌 추적 결과를 공개했다. 온천 계약금으로 이 씨가 유 씨에게 건네준 9억6000만 원의 흐름이었다. 유 씨는 이 씨를 죽이고 경찰에 체포된 지 3시간 도 안 지났을 무렵 증권계좌에 남아있던 3억4000만 원을 자신의 동생들 계좌로 빼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배심원의 눈과 귀가 집중됐다. 받은 돈을 주식에 투자해 1억 원의 손실을 본 사실도 확인됐다. 또 유 씨가 구치소 접견실에서 ‘주식 손실 때문에 죽였다고 그러면 나는 무기징역이나 사형이야’ ‘주식 손실금 1억 때문에 죽였다 그러면 안 되니까 공탁을 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도 공개됐다. 고교 동창 등 지인들에 대한 증인 신문에서도 유 씨가 그동안 주장해 온 괴롭힘과 겁박은 드러나지 않았다. 검사는 결국 “이번 사건이 ‘가방모찌의 반란’이 아닌 금전문제에서 비롯된 계획적 범행으로 엄벌이 필요하다”라며 유 씨에게 무기 징역을 구형했다.
○ 어머니의 기일…다시 모인 가족
21일 오전 2시 반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부장판사 정영훈)는 유 씨에게 살인 혐의로 징역 23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앞서 배심원단 9명 가운데 4명이 유 씨에게 징역 23년 형을 선고할 것을 재판부에 요청한 것과 같은 결과다.
정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라며 “동업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점은 인정되지만 구타나 폭행을 당했다는 입증에 소명이 없다”라고 밝혔다. 또 “어떤 사유에 있어서도 생명을 존중해야 하며 함부로 박탈한 것은 옳지 못한 선택”이라고 피고인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재판을 진행하며 줄곧 굳은 표정을 유지하던 김 검사의 표정이 다소 홀가분해 보였다. 이 씨의 형과 여동생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이 씨 가족은 이날 새벽에야 어머니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이날은 이 씨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노현주 인턴기자 성신여대 불문과 4학년
김재화 인턴기자 서강대 영문과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