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박현모]비틀스와 이순신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전설적인 록그룹 비틀스를 얘기할 때 흔히 함부르크 시절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영국의 평범한 그룹사운드의 하나였던 그들이 독일 함부르크로 건너가 4년여의 피나는 연습 끝에 세계 최고의 록 밴드가 됐기 때문이다. 함부르크는 북위 55도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쌀쌀한 밤이 긴 탓에 술집에 늘 손님이 북적거린다. ‘아웃라이어’ 저자 맬컴 글래드웰에 따르면 비틀스가 함부르크의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했을 때 그들의 연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음향시설도 좋지 않았고, 급료를 받지 못한 때도 많았다. 다만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특혜는 엄청나게 많은 연주시간이었다.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의 말처럼 그들은 “하루 8시간씩 일주일에 7일 밤을 연주했다.” 다른 그룹들이 술과 여자로 젊음을 탕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보충하면서 기량을 닦았다. 그들은 직접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드럼과 베이스도 맡았고, 작사에 작곡까지 스스로 했다. 무대와 청중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자유자재로 공연할 수 있는 그야말로 독립적인 록 밴드가 탄생한 것이다.

나는 비틀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다. 남해안 최전방에서 국가 지원이 전혀 없는 가운데 전투 지휘는 물론이고 선박 및 화포 제작에서부터 농사짓는 일까지 모든 것을 그 스스로 운용해야 했다. 그는 무엇보다 철저한 군사훈련으로 조선 수군의 기량을 높이는 데 전념했다. 1591년 2월 13일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직후부터 시작된 곤장 세례와 활쏘기 훈련 등은 그가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거듭했나를 잘 보여준다. 그렇게 볼 때 그가 부임할 때부터 그 다음 해의 한산도대첩에 이르는 1592년 7월 8일까지 512일의 시간은 일종의 ‘함부르크 시절’이었다. 비틀스가 1960년에서 1962년 사이 270일의 밤을 연주해 최고 기량의 록밴드가 된 것처럼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도 피나는 연습 끝에 백전불패의 최강 군대로 거듭난 것이다.

세계적 밴드 만든 270일의 밤

한산도대첩의 승리는 연습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패한 척 물러나는 아군을 빠르게 추격해오는 적선이 바다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우리 배를 180도 선회하여 포위한 상태에서 각종 화포로 공격해 괴멸시키는 학익진(鶴翼陣)은 그야말로 창의력의 산물이었다. 이순신은 우선 전통 한선의 구조를 개량해 전투력을 극대화시켰다. 전선의 하단에 배의 동력이 되는 비전투원(격군·格軍)을 배치해 노 젓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고, 그 위의 상장갑판에 화포 등을 담당하는 전투원(사부·射夫)을 배치하는 식으로 기능을 나눠 속도와 공격력을 동시에 증강시킨 것이다. 또한 배를 근접시킨 후 등선(登船)하여 육박전을 벌이는 것이 고작이었던 종래 수군의 전투 방법에 학익진이라는 육전에서나 사용하던 진법을 적용했다. 지용희 교수의 지적처럼 그것은 이순신이 육군 출신으로서 각종 병법에 통달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분화된 기능에 숙련된 전투원들과 창의적 지휘자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아래 똘똘 뭉친 결과 조선 수군은 56척의 배로 73척의 적선 중 59척을 격침 또는 나포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는 극찬을 받은 한산도대첩에는 전투원의 노력과 지도자의 창의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지난주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충무공이야기’라는 시민강좌를 진행하면서 이순신의 언행을 꼼꼼히 되읽어가고 있는데, 그는 한마디로 비전을 공유시킬 줄 아는 지도자였다. 휘하 장병들에게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누차 강조해서 말하곤 했다. 서해안을 굳게 지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곡창 호남 연해를 보호하는 일, 그것이 무너지면 고향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사는 그대들의 바람도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장벽이다.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국가도 없다(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는 그의 말은 그런 사명감의 다른 표현이다.

승전 신화를 낳은 512일

“이순신은 기율을 중시하면서도 군졸을 사랑했다”는 ‘선조실록’ 사관의 평가처럼 그는 엄격한 지휘관이었지만 동시에 부하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줄 아는 장군이었다. 그는 휘하 장병들을 모아놓고 병영 근처의 수많은 피란민들에게 지금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지, 국가를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역설하곤 했다. 배 만드는 기술자 나대용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꿈꾸던 비전을 발견하고, 최첨단 무기 거북선을 만들게 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나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기에 그들은 손발이 부르트는 고된 훈련을 감내했고, 적진에 뛰어드는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열정을 일깨우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었던 이순신의 리더십 이야기를 다음 주 강좌에서는 비틀스의 록 음악과 함께 시작하려 한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