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韓-네덜란드 수교 50주년… 强小國 네덜란드에서 배워야 할 정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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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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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정신… 열악함 딛고 새 영역 개척 끝장토론… 계급장 떼고 설득 또 설득
열린문화… 가능성 열고 자율성 중시

《 한국의 절반도 안 되는 좁은 국토, 1600여만 명에 불과한 인구, 강대국 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위치. 그러나 이미 17세기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동방무역을 장악했으며 처음으로 증권거래소를 세워 현대 금융시장을 이끈 나라. 바로 네덜란드 얘기다. 4일은 한국이 네덜란드와 수교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처럼 천연자원이 부족하지만 지난해 네덜란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만6418달러로 한국의 배가 넘는다. 세계를 호령하는 이 나라 기업도 적지 않다. 네덜란드를 작지만 강한 나라로 만든 비결은 뭘까. 답을 찾기 위해 한국에 진출한 네덜란드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
하이네켄 들고 건배 1일 서울 중구 정동 주한 네덜란드대사관에 네덜란드 기업 CEO들이 모여 ‘기업가 정신’에 관한 토론을 하기에 앞서 하이네켄 맥주를 들고 건배를 외쳤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유룬 플락 ING은행 한국 대표, 얀아리 스미트 하이네켄코리아 사장, 존 와일리 ING생명 사장, 안승범 쉘퍼시픽엔터프라이시스 사장, 파울 멩크벌트 주한 네덜란드 대사, 신성훈 ASML코리아 대표.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하이네켄 들고 건배 1일 서울 중구 정동 주한 네덜란드대사관에 네덜란드 기업 CEO들이 모여 ‘기업가 정신’에 관한 토론을 하기에 앞서 하이네켄 맥주를 들고 건배를 외쳤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유룬 플락 ING은행 한국 대표, 얀아리 스미트 하이네켄코리아 사장, 존 와일리 ING생명 사장, 안승범 쉘퍼시픽엔터프라이시스 사장, 파울 멩크벌트 주한 네덜란드 대사, 신성훈 ASML코리아 대표.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1일 서울 중구 정동 주한 네덜란드대사관에서 유룬 플락 ING은행 한국대표, 존 와일리 ING생명 대표이사 사장, 안승범 쉘퍼시픽엔터프라이시스(로열더치셸의 한국지사) 사장, 신성훈 ASML 코리아 대표이사, 얀아리 스미트 하이네켄 코리아 사장 등 CEO 5명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 파울 멩크벌트 주한 네덜란드 대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 계급장 뗀 토론문화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현지 장교를 지낸 뒤 다국적 에너지 기업 ‘엔론’에서 일하다 4년 전 네덜란드 헤이그의 셸에 임원으로 입사한 안승범 사장은 첫 회의를 잊을 수 없다. 젊은 여직원이 브리핑을 하는데 너무 장황해서 “시간이 없으니 핵심만 얘기하고 끝내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 직원은 “셸에 새로 왔으면 아무리 임원이어도 현장의 세세한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한다”며 브리핑을 계속했다.

한참 어린 직원에게 무안당했다 싶어 불쾌했던 그에게 그 여직원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우리 회사에 새로 왔으면 누구나 프로젝트의 디테일을 모두 알아야 한다”며 이번에는 아예 일주일에 한 번 미팅을 잡았다. 안 사장은 처음엔 황당했지만 점점 이런 권위에 억눌리지 않는 열린 문화가 네덜란드 ‘기업가 정신’의 핵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삼성전자에서 18년간 근무한 뒤 2008년부터 네덜란드의 반도체소재 회사 ASML의 한국지사장을 맡고 있는 신성훈 대표도 네덜란드 사람들의 ‘끝장 토론’에 기가 질렸다고 털어놓았다. “네덜란드 직원들은 상사가 지시해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시작하지 않아요. 상사는 부하가 이해할 때까지 설명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문화는 네덜란드 기업이 한국 기업을 상대로 업무를 할 때 종종 어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안 사장은 “고객인 한국 기업이 특별한 요구를 해올 경우 네덜란드 본사는 ‘고객이 왜 그렇게 원하는지’ 설명하길 바란다”며 “한국 고객이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난감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 도전정신과 열린 리더십


네덜란드의 열린 문화(openness)에는 ‘가이드라인’을 두지 않고 스스로의 세계를 도전적으로 개척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이 있다. 이 같은 교육철학은 ‘네 세계를 스스로 열어라(Open your world)’로 요약된다.

네덜란드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를 대하듯 교사의 이름을 부른다. 선생님이 파울 멩크벌트라면 ‘미스터 멩크벌트’가 아니라 그저 ‘파울’이라 부르는 것이다. 학생도 교사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개체로 대우받기 때문에 이상할 것이 없다. 교사의 역할은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지리적 조건도 ‘열린 문화’의 배경이 됐다. 멩크벌트 대사는 “네덜란드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바다를 끼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 무역을 해야 했다”며 “어떤 낯선 환경에서도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DNA가 교육을 통해 면면히 유전되고 있다”고 말했다.

호주 출신인 와일리 사장은 네덜란드를 처음 방문했을 때 놀이터의 아이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서너 살 아이들이 모래성을 지으며 놀면서도 ‘캡틴’을 정해 리더 임무를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플락 대표는 “네덜란드 아이들은 사이클을 할 때도 두 팀으로 나눠 팀별로 캡틴을 뽑는다”며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리더십과 경쟁을 배운다”고 설명했다.

네덜란드의 리더는 직위, 나이, 재산 따위와는 무관하다. 이보다는 문제해결 능력에 달려 있다. 명령과 복종이 생명인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멩크벌트 대사는 “네덜란드에선 군인을 선발할 때도 상사가 지시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상황을 파악해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고 말했다.

와일리 사장은 “한국에선 내가 사장이고,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존경받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말, 나의 기여와 가치에 따라 존경받는다”고 말했다.

○ “한국 경쟁력은 실행력과 서비스”

CEO들은 네덜란드가 한국에서 배워야 할 점도 많다고 입을 모았다. 멩크벌트 대사는 “네덜란드인이 토론하고 대화할 때 한국인들은 이미 일을 끝내 놓는다”며 한국인의 빠른 실행력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네덜란드에 비해 토론문화는 부족하지만 실행하는 능력은 매우 탁월하다”며 “헌신적으로 실행에 집중하는 능력 덕택에 한국이 고속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플락 대표도 “한국인은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며 “40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나라가 이처럼 성장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철저한 서비스 정신도 네덜란드인들이 놀라는 부분이다. 스미트 사장은 “서울에 와 TV를 샀는데 고르자마자 바로 집으로 배송해주고 기사가 설치까지 완벽하게 끝내주는 데 감동받았다”면서 “네덜란드 같았으면 직접 무거운 TV를 들고 와 매뉴얼을 뒤져 낑낑거리며 설치해야 했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반면 외국 기업이 한국에서 사업하는 데 어려운 점으로 와일리 사장은 “한국은 회색(grey) 영역이 많다”고 지적했다. 법이나 계약에 애매한 부분이 많아 수많은 상황을 명확히 규정하는 네덜란드 문화에선 적응하기 힘들 때가 있다는 것이다.

또 네덜란드에서는 국내외 기업을 ‘공평한 경쟁의 장’ 원칙에 따라 동등하게 대우하지만 한국에서는 은근히 외국 기업을 차별하는 문화가 남아 있어 어려울 때가 있다고 네덜란드 기업인들은 입을 모았다. 멩크벌트 대사는 “올 7월부터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공평한 사업 환경을 갖추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 실용 - 창의적 교육이 기업가정신 만든다… 네덜란드 경제교육 ▼

4월 30일은 율리아나 여왕(재위기간 1948∼1980)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네덜란드의 축제일인 ‘여왕의 날’이다. 어린이들은 이날을 위해 1년 내내 인형, 책, 옷, 자전거 등 필요 없는 물건들을 모은다. 과자나 케이크를 만들기도 한다. 내다 팔 물건의 가격도 직접 매긴다.

마침내 여왕의 날. 집에서 가까운 광장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린이들은 이른 새벽 집을 나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쟁 원리’를 배운다. 이날만큼은 어린이들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상인’ 대접을 받는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물건을 사고팔 때는 냉정하게 흥정을 한다. 가족들은 아이들 주변에서 흥겨운 음악을 틀어주고 흥정할 때 도움도 준다.

한국 어린이들이 교과서에서 ‘시장경제’를 암기할 때 네덜란드 어린이들은 온몸으로 돈을 벌기가 얼마나 힘들며, 시장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체험한다. 네덜란드 ‘기업가 정신’의 배경에는 이처럼 실용적이면서도 창의적인 교육 시스템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중고등학교를 통합 운영한다. 학생들은 능력과 적성에 따라 직업준비중등학교(VMBO·4년 과정), 일반중등학교(HAVO·5년 과정), 대학준비학교(VWO·6년 과정) 등 세 가지 유형의 학교를 선택한다. 직업준비중등학교 졸업생들은 바로 취업을 한다. 일반중등학교 졸업자는 응용과학대학에 진학할 자격이 주어진다. 대학준비학교 졸업자는 연구중심대학 진학을 꾀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실용적인 직업의 인기가 높아 곧바로 취업하는 직업준비중등학교에 진학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 덕분에 네덜란드의 창업률은 유럽 선두이며 20대 초반의 ‘사장님’도 적지 않다. 다양한 창업지원 시스템도 갖춰져 있다.

네덜란드를 찾은 외국인들이 놀라는 것 중 하나는 뛰어난 영어 실력이다. 택시 운전사, 거리의 상인도 모두 상당한 수준의 영어를 할 줄 안다. 파울 멩크벌트 주한 네덜란드대사는 “세계인을 상대하려면 외국어가 필수라는 것을 모두 체감하고 있다”며 “대부분의 네덜란드인이 2, 3개 언어는 기본적으로 구사한다”고 말했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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