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트루 웨스트’ 두텁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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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9일 17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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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적인 형제를 통해 미국적 서사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연극 \'트루 웨스트\'. 왼쪽이 반항적인 형 리 역의 오만석 씨, 오른쪽은 범생이 동생 오스카 역의 조정석 씨.
사진 제공 악어컴퍼니
대조적인 형제를 통해 미국적 서사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연극 \'트루 웨스트\'. 왼쪽이 반항적인 형 리 역의 오만석 씨, 오른쪽은 범생이 동생 오스카 역의 조정석 씨. 사진 제공 악어컴퍼니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연극이 있습니다. 돈 되는 연극과 돈 안 되는 연극? 작품성 위주의 연극과 재미있는 연극? 특정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과 그렇지 않은 연극?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투명한 연극과 두터운 연극입니다. 이것은 소위 대중연극이든 예술연극이든 모두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예술연극 중에서도 메시지가 뚜렷하면 투명한 연극이 됩니다. 대중연극 중에서도 곱씹을 부분이 많으면 두터운 연극이 됩니다.

투명한 연극은 종종 쉬운 연극으로 오해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투명한 연극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뚜렷한 연극입니다. 예술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시사풍자극이 그에 해당합니다. 두꺼운 연극은 어려운 연극으로 오해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알고 보면 메시지가 명쾌한 연극도 많습니다. 따라서 투명한 연극은 예술적으로 조야하고 두꺼운 연극은 예술적으로 뛰어나다는 통념은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소설과 달리 연극은 관객의 직관에 호소합니다. 쉽게 말해 소설의 독자는 참을성이 많지만 연극관객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설은 시간을 두고 띄엄띄엄 읽을 수 있어도 연극은 제한된 시공간에서 결판을 내야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희곡작가는 관객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투명한 이야기를 지향합니다.

반면 연극은 언제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TV드라마와 또 다릅니다. TV드라마는 중간부터 봐도 언제든 쫓아갈 수 있지만 연극은 특정 시간과 장소를 벗어나면 제대로 맛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연극은 언제 어디서든 소비될 수 있는 TV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보다 두터운 이야기를 보여줘야 합니다.

투명한 연극과 두터운 연극은 그런 고민 속에서 어떤 방향성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트린드베리가 말한 '꿈의 연극'은 투명하면서도 두터운 연극일 것입니다. 쉽게 말해 직관적으로 이해가 잘 되면서도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계속 곱씹어보게 만드는 연극입니다.

자, 이를 통해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연극이 있다는 이 글의 첫 번째 명제가 자연스럽게 부정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엔 세 가지 종류의 연극이 있습니다. 투명한 연극, 두터운 연극 그리고 투명하지만 두터운 연극. 제 관극기(觀劇記)는 그런 연극의 결을 반대로 풀어내는데 있습니다. 투명한 연극을 두텁게 풀어내고 두터운 연극을 투명하게 풀어내는 것. 그럼 투명하면서도 두터운 연극은?
연극 '트루 웨스트' 형제의 대립장면.
연극 '트루 웨스트' 형제의 대립장면.

연극 '트루 웨스트'(연출 유연수)가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영화 '파리, 텍사스'의 극작가 샘 세퍼드가 쓴 이 작품은 참 투명합니다. 도회적인 동생 오스틴(조정석)과 야성적인 형 리(오만석), 두 대조적 형제의 이야기는 별 도움 없이 웃고 즐길 수 있습니다. 무대는 미국 LA 교외의 한 중산층 주택가. 아이비리그를 나와 시나리오 극작가로 적당히 성공한 오스틴과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리는 오랜만에 이 고향집에서 며칠을 보내게 됩니다.

어머니가 알래스카로 휴가를 떠나면서 오스틴에게 집을 봐달라고 했는데 마침 어머니와 이혼하고 요양원에서 지내는 아버지를 만나고 온 리가 이 집을 방문한 것입니다. 형제는 대조적 캐릭터를 지녔습니다. 동생 오스틴이 '범생이'라면 형 리는 '반항아'입니다. 결혼해 가정을 꾸린 오스틴은 책임감 많고 신중한 반면 솔로인 형 리는 변덕스럽지만 자유롭게 삽니다. 동생은 잘 살지만 형은 가난합니다. 대신 동생은 해야 할 것이 많고 형은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동생은 정리정돈이 잘 된 어머니 집 관리를 맡으면서 할리우드의 잘나가는 제작자 사울(임진수)을 만나 몇 년간 진행해온 영화 프로젝트의 최종계약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형이 끼어들면서 묘한 긴장이 빚어집니다. 형이 자신이 구상했다는 '진짜 서부극'의 구상을 들려주는데 깐깐하기로 유명한 사울이 이에 혹해 동생과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접고 형의 구상을 영화화할 의사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를 기점으로 형과 동생의 관계가 서서히 역전됩니다. 한껏 고무된 형은 그럴 듯한 시나리오를 쓰려고 작정하고 동생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충격을 받은 동생은 형의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받아쓰다가 술에 취합니다. 그리고 형처럼 '막 살기'로 결심하고 깽판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극적 재미는 이런 역전이 일어나는 후반부에 발생합니다. 범생이 동생이 반항아 형이 벌이던 온갖 진상을 확대 재생산하는 동안 필생의 기회를 얻게 된 형이 평소 동생의 입장에서 이를 무마시켜야하는 반전이 발생합니다.

연극은 이런 극적 요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오만석 씨는 까칠하고 막 되먹은 형에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소시민처럼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한껏 부풀어 오른 연기로 펼쳐냅니다. 조정석 씨는 '온실 속 화초'가 갑자기 '사막의 선인장'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폭발적 연기를 보여줍니다. 처지가 바뀐 형제의 모습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TV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현빈·하지원 커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웃음과 페이소스를 안겨줍니다.


이를 놓고만 보면 '트루 웨스트'는 투명한 연극입니다. 흑백으로 대조되는 형제가 빚어내는 코미디. 하지만 이 작품을 그 제목과 연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두터운 연극이 드러납니다. '진짜 서부'라는 연극의 제목으로 인해 연극 속 형제는 엘리아 카잔 감독의 영화 '에덴의 동쪽'의 두 형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영화 속 형제는 성경의 카인과 아벨을 미국적 맥락 속에 투영한 것입니다.

영화에서 제임스 딘이 연기한 반항아 칼은 쌍둥이지만 모범생인 애런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오열합니다. '트루 웨스트'에서도 반항아 리가 모범생 오스틴의 삶을 뿌리부터 뒤흔들어버립니다. 그로 인해 오스틴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형 리와 같이 사막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리는 이를 뿌리치고 분노에 사로잡힌 오스틴은 리의 목을 조릅니다. 그렇다면 '에덴의 동쪽'과 달리 리가 아벨이 되고 오스틴이 카인이 되는 걸까요?

연극은 쉬이 어느 쪽 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형제는 서로를 선망하는 동시에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들은 카인인 동시에 아벨입니다. 오스틴이 코스모스(cosmos)로서 질서를 상징한다면 리는 카오스(chaos)로서 무질서를 대표합니다. 미국인들에게 서부란 무엇입니까. 코TM모스인 문명에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으로서 카오스이자 아메리칸 드림을 공간화한 이념입니다.


극작가 세퍼드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런 서부의 이념적 허구성을 드러내고 싶어한 것 같습니다. 코스모스를 대변하는 오스틴은 카오스를 상징하는 리 앞에 무력하게 무너집니다. 교양과 문명으로 무장한 오스틴은 리의 야성적 매력 앞에 허물어집니다. 오스틴이 질서정연하게 관리하던 어머니의 집이 극 종반부 난장판이 되어버리는 것이 이를 상징합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코스모스는 해체되고 카오스가 증대됩니다.

하지만 리의 야성적 매력이라는 것도 허구입니다. 그가 사막에서 사는 이유는 좋아서가 아니라 가난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입니다. 그가 떠들어대는 '진짜 서부극'이란 것도 들어보면 리얼한 체험이 담긴 것이 아닙니다. 치졸한 치정극에 서부라는 광활한 공간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스펙터클한 환상을 투여한 것에 불과합니다. 사울이 리에게서 발견한 매력의 실상은 바로 그러한 거대한 허무일지 모릅니다. 웨스턴 영화가 됐건 아메리칸 드림이 됐건 미국적 설화는 실상 그렇게 거대한 허상의 산물입니다.

원작이 겨냥한 것은 이렇게 철저히 미국적인 담론 뒤에 숨어있는 허구성입니다. 물질문명의 세례를 한껏 받은 오스틴이 느끼는 허기만큼 사막에서 생활하는 리의 야성적 자유의 궁핍도 거침없이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형제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연극 속엔 등장하지 않지만 알코올중독에 걸린 채 요양원에 버려진 아버지-세퍼드 원작의 '풀 포 러브'에도 등장하는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입니다.

술에 취한 오스틴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그 아버지는 이가 몽땅 빠져도 돈이 없어서 멕시코까지 가서 틀니를 해 넣어야할 만큼 가난하면서도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고집 센 인물입니다. 작가는 어쩌면 우리가 익숙한 서부극의 총잡이가 아니라 이 늙고 가난한 아버지야말로 진짜 서부극의 주인공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강인하고 고독하지만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사막을 방황하는 늙은이야말로 진짜 미국적 서사의 주인공이란 이런 암시의 힘이 이 작품을 두텁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미국적인 맥락 속에서 리와 오스틴 형제는 카인과 아벨을 넘어서 두 명의 이쉬마엘(아브라함의 서장자이자 적자인 이삭의 탄생으로 버려진 아들이자 허먼 멜빌의 소설 '백경'의 주인공)로서 미국 관객에게 강렬한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입니다. 동시에 이 연극이 미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그만큼의 호소력을 지닐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형 리 역으로 배성우 김태향 씨가, 동생 오스틴 역으로 홍경인 이율 김동호 씨가 돌아가며 출연합니다.

4만~5만5000 원. 2월27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컬처스페이스 엔유. 02-764-8760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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