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관객 학대 영화 ‘악마를 보았다’…감독은 “와사비 덜 묻은 초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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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2일 16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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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국정원 요원 수현(이병헌)의 약혼녀가 토막시신으로 돌아온다.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어느 날, 국정원 요원 수현(이병헌)의 약혼녀가 토막시신으로 돌아온다.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스릴러의 외피를 쓴 스너프 필름인가?'

2시간 20분짜리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감상하는 일은 힘들었다. 세 차례에 걸친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의 심의 끝에 가까스로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이 영화의 '실체'를 11일 오후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확인했다.

첫 살인은 영화 시작 10분이 지나기 전에 일어났다. 눈 오는 밤 타이어 펑크로 정차한 여성 운전자에게 타이어를 갈아주겠다고 친절하게 접근한 보습학원 차량 운전기사 경철(최민식 분)은 갑자기 쇠망치를 휘두른다. 기절한 여자를 아지트로 끌고 온 남자는 작업용 '도구'를 고르더니,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자를 말 그대로 '썰어' 버린다.

이쯤에서 영화 깨나 봤다는 관계자들도 참지 못하고 나가버렸다.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 비상구를 찾는 행렬은 영화 후반까지 계속됐다. 다 보고 나온 사람들도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결코 상영해선 안 될 나쁜 영화다", "할리우드 진출 일보 직전이라 그런지 감독이 너무 나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 표현의 한계를 넘어선 피 냄새 비릿한 살육의 현장


보습학원 차를 몰고 다니며 무차별적으로 살인, 강간을 일삼는 장경철(최민식).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보습학원 차를 몰고 다니며 무차별적으로 살인, 강간을 일삼는 장경철(최민식).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영화를 보고 '왜', '어째서'가 담보되지 않으면 톱 배우들과 감독의 만남이 반드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국정원 요원인 주인공 수현(이병헌)이 약혼녀를 잔인하게 죽인 연쇄살인마에게 처절하게 복수하는 내용이 주가 됐다고는 하나, 왜 그렇게 잔인하고 처참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내내 비릿하고 퀴퀴했다. 식칼과 망치, 송곳, 쇠 파이프 같은 도구를 이용한 둔탁한 폭력은 거칠고 지루하게 계속됐다. 집에 단두대까지 마련해 놓은 연쇄살인마 경철은 어린 소녀부터 임산부까지 닥치는 대로 사냥한다. 8명 가량이 무참히 살해됐고, 살해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사람까지 합치면 희생자는 10명이 넘는다. 여기에 인육을 먹는 경철의 친구, 모텔 주인 커플까지 합세해 이곳이 악마가 사는 지옥인지, 인간 세상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어진다.

두 차례 '제한 상영가' 판정을 받으며 7~8군데를 편집했으나, 알고 보니 컷을 완전히 들어낸 게 아니었다. 잔인한 장면의 지속 시간만 줄였다. 잘려나간 분량은 1분 30초밖에 되지 않았다.

시사회 직후 김지운 감독은 "등급을 받기 위해 편집을 하다 보니 와사비가 덜 묻은 생선 초밥을 먹는 느낌"이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기자는 십여 년 곱게 키운 애완견을 '언놈'이 핏물이 뚝뚝 나오게 육회 쳐서 쩝쩝거리며 먹는 걸 보는 것처럼 불쾌했다. 주연배우 이병헌은 "충분히 와사비 범벅이 된 회 무침"이라고 평했다. 영화계에선 영상물 등급위원회가 내키지는 않지만 3번까지 반려하기엔 부담이 커 하는 수 없이 통과시켰다는 해석도 나온다.

살육 그 자체를 즐기는 살인마와 터미네이터 같은 단죄자, 사지절단 범죄 등은 로버트 로드리게스 감독의 흑백영화 '씬 시티'를 연상케 하지만, 그보다 덜 유머러스하고 덜 스타일리시하며 게다가 원색이다.

수현에게 죽지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풀려난 후에도 경철(오른쪽)의 사악한 범죄는 끝나지 않는다. 그는 부러진 팔을 치료받으러 간 병원 주사실에서 간호사를 강간하려  든다.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수현에게 죽지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풀려난 후에도 경철(오른쪽)의 사악한 범죄는 끝나지 않는다. 그는 부러진 팔을 치료받으러 간 병원 주사실에서 간호사를 강간하려 든다.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 무지막지하게 강한 두 놈의 '끝장' 게임

표현 수위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방식도 이해하기 어렵다. 수현은 용의자 범위를 좁혀가는 과정에서 경철의 범행을 확신한다. 영화 중반부가 되기도 전의 일이다. 수현이 택한 방식은 경철을 잡아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만 주고는 다시 놓아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약혼자가 당한 고통을 수천 배로 되갚아 주기 위해서'라는 수현 나름의 이유가 개입된다. 수현은 경철을 잡아 송곳으로 신체를 훼손하거나 손목을 부러뜨리고 한적한 곳에 버리는 행동을 반복한다.

처음에는 어떤 미친놈에게 걸린 줄로만 알았던 경철은 점차 자신을 '가지고 논' 놈의 정체를 어렴풋이 가늠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수현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던 게임이 바뀐다. 그리고 경철을 완벽하게 제압했다는 수현의 만용은 또 다른 죄 없는 자들의 피를 부른다. 생각지 못했던 지인들이 경철의 손에 끔찍한 일을 당한다.

물론 이병헌, 최민식 두 배우가 보여주는 동물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액션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나 그것뿐이다. 경철이 왜 살인을 계속하는지, 수현은 경철이 계속 살인, 강간을 저지르는데도 왜 잡았다 놓아주기를 반복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김 감독이 말한 대로 '괴물을 쫓는 자가 괴물이 된 부조리'를 그리고자 했다고 쳐도 영화가 주는 철학은 여전히 부족하다. 마지막 수현이 감행한 '처절한 응징'도 해소의 쾌감을 주지 못한다. 혹시 감독은 '끝장까지 한번 가볼래?'라는 메시지를 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연쇄살인마 경철을 잡고 풀어주기를 반복하며 수현(왼쪽) 역시 '악마'가 되어간다. 경철을 찾아 모텔로 들어간 수현. 인육을 먹는 모텔 주인이 그를 노린다.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연쇄살인마 경철을 잡고 풀어주기를 반복하며 수현(왼쪽) 역시 '악마'가 되어간다. 경철을 찾아 모텔로 들어간 수현. 인육을 먹는 모텔 주인이 그를 노린다.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 '고양이 학대 동영상'이 불편했다면 '비추천'

이 영화는 12일 500개가 넘는 상영관에서 개봉했다. 주말을 앞두고 영화 동호인 사이트에는 영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행여나 스타일리시한 감성 액션 '달콤한 인생', 박진감 넘치는 웨스턴 액션 활극 '놈놈놈'의 김지운 감독을 떠올리며 극장으로 향하는 관객이 있을까봐 걱정된다.

감독의 정신적인 공격을 당해 낼 자신이 있으면 모를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이 영화를 선택해선 안 된다. 영화를 보고 심신이 '매우' 피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양이 학대 동영상'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대다수의 정상인에게는 '비추천'한다.

단, '친절한 금자씨' 이후로 5년 만에 상업영화로 복귀한 최민식의 팬들은 예외다. 얼굴에 깊이 파인 주름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때론 단순무식한 때론 영리한 악마 같은 얼굴을 만들어 낸 최민식은 토미 리 존스나 앤서니 홉킨스를 연상케 할 정도로 대단했다.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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