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사진사랑 이야기]<1>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동아일보 입력 2010-01-15 03:00수정 2011-05-1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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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아름답게 보면 됐잖아, 예술성 찾고 그러진 말자고”
《2004년 2월 어느 날. 허름한 잠바에 벙거지를 쓴 초로의 남성이 곧 사라질 청계천 풍물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다. 정년을 지나 갓 사진에 입문한 듯 어수룩했지만 느릿한 동작에서는 여유로움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 자세히 쳐다보니 두산중공업 박용성 회장이다. 박 회장이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단순한 취미인지, 전문가의 수준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사랑과 관련된 많은 일화를 갖고 있다. 바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시절 아테네와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에서 우리 선수들 모습 찍기에 골몰한 일, 골프 치러 가선 카메라로 주변 야생화를 찍는 데 열중해 동반자들에게 핀잔 들은 일, 인터뷰를 하다 주변 풍경이 마음에 들자 취재기자의 카메라를 빌려 사진을 찍고 메모리 칩을 빼낸 일 등등….》

그는 중학교 때 아버지가 사준 ‘리코플렉스’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로 사진과 인연을 시작했다. 고교 시절까지는 습작 수준, 그 후 사진을 잊고 지내다 1980년대 동아출판사를 인수해 두산세계백과사전을 만들 때 대부분의 사진이 무단 전재된 것에 놀라 본인도 직접 사전용 사진을 찍었다. 두산의 인터넷 백과사전인 엔싸이버에는 그가 찍은 사진 수만 장이 올라 있다.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손에 잡은 것은 기자보다도 빠른 1999년. 현재 주로 쓰는 제품은 캐논 카메라다.

작년 세밑 국립중앙박물관 앞뜰 박 회장이 포함된 서울대 상대 동창들의 사진촬영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일찌감치 참석한 동창들로 집단 인터뷰 분위기다.

―동창들과 자주 모임을 갖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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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조로하잖아. 인생 후반에 시간을 죽일만한 것이 있어야 인생도 즐겁잖아. 영감탱이들도 은퇴해 집에만 있지 말고 사진 배워야 해. 노후에 시간 보내기에도 최고 좋고…. 그래서 끌고 다니기 시작했어. 주로 풍경사진을 찍어. 제일 쉽기도 하고…. 하지만 사실 풍경사진은 쉬우면서도 어려워. 잘 알겠지만, 가장 찍기 어려운 게 정물이잖아? 우리가 보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면 됐지, 뭐 거기서 예술성을 찾고 어쩌고 그러진 말자라고 우리끼리 얘기해. 근데 지들은 요즘 자칭 영상전문가래요.”(일동 웃음)

―회장님은 사진의 예술성보다는 기록성을 중시한다면서요?

“파리나 뉴욕에 가면 1979년 내가 처음 갔을 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어. 중간에 근사한 건물 하나 생긴 게 차이지. 우리나라, 서울처럼 빨리 바뀌는 나라나 도시가 없어. 멀쩡한 아파트 때려 부수고 재개발해서 싹 새걸로 바꾸니까. 그러니까 중앙청 사진이 지금 별로 없다고. 우리 엔싸이버에 중앙청 사진을 외국에서 사왔어. 기록이 없으니까. 미국 같은 경우 내셔널 아카이브가 있어. 거기서 각종 기록사진을 정리보관해서 일반에게 공개하잖아. 민간이라도 우리나라 전체를 찍어서 사진으로 보관해 놓자고 생각했어. 그래서 사진 찍으면 무지하게 많이 찍어. 다른 사람이 동대문사진 전경 한 장을 찍는다면 우리는 동대문 뺑뺑 돌아가면서 수십 장 찍어. 건축하는 학생이 동대문이 어떻게 생겼나 알고 싶으면 우리한테 오라 이거야. 동대문 전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 위해서는 사진 1장이면 충분하지만, 우리는 그게 아니고 앞, 뒤, 지붕, 기와는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다 보여주는 거야.

전국에 행정 구역상 ‘리’가 1만4000여 개인데 엔싸이버가 다 찍고 있거든. 그래서 한 200만 장 모았고 올핸 한 300만 장까지 만들려고 그래. 전국에서 열 몇 명이 찍었을 거야. 거기 내가 좀 도와주고 있고 이 영감들도 사진을 올리고 있어요.”

그는 동창들을 ‘지’와 ‘영감’이라고 불렀다.

―야생화 사진은 언제부터 찍으셨나요? 2010년 달력을 작년보다 4000부나 많은 3만8000부나 만드셨다는데….

“디지털카메라가 나온 1998년 이후부터 꽃 사진을 찍었어요. 접사렌즈 하나 사서 찍어보니까 괜찮더라고. 2004년도에 2000부, 작년(2008년)에 3만4000부 찍었는데, 그렇게 달력이 조금씩 늘어나더라고. 꽃 사진을 찍으니까 남들이 놀려. 날더러 음화제조가라고 그래. 꽃이 식물의 성긴데 성기만 확대해 자꾸 찍으니까 너 포르노그래피를 찍는 거 아니냐고.”

―사진 찍을 때 미리 콘셉트를 잡나요?

“그냥 카메라 둘러메고 나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피사체야. 지나가는 어린애도 그렇고…. 그렇다고 사진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는 건 다 헛소리고, 사진 찍으러 가서 강산 아름다운데 찍어보니 더 아름답다 그러면 되는 거지. (갑자기) 다음에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만나면 물어봐요. 마찬가질 거라고. 그 양반 사진집 봤어요? 내가 출판기념회에 갔다 왔는데 그 양반은 아침하고 저녁을 좋아하데. 나는 요즘 사람 뒷모습을 많이 찍어. (의도하고 찍는 사진도 있단다.) 짝을 지어 가는 사람, 둘이서 팔짱끼고 가는, 난 팔짱을 끼지 않으면 안 찍어. 그 뒷모습 찍는 것도 참 재미있어. 남녀가 나이에 상관없이 짝을 지어가는 뒷모습 있잖아. 사람들이 뒷모습 보고 아 이 사람들 뒷모습은 이렇게 근사한데 앞모습은 어떨까, 기대감도 있지만 또 반대로 실망할 수도 있잖아요.”

요즘엔 뒷모습을 많이 찍어
팔짱 끼고 가는 사람들
뒷모습을 보면서
앞모습은 얼마나 근사할까
기대도 해보고…


―결국 예술사진도 하시는 거네요?

“왔다갔다 장난하는 거지 뭐, 다 잘 나오면 되는 거지. 난 사진의 화두엔 신경 안 써요.”

―요즘 카메라는 뭘 쓰세요?

“보통 때는 캐논 G11 조그만 거 들고 다니는데 필요에 따라 카메라가 달라. 중앙우체국 옆에 있는 캐논 대리점에서 새 제품이 나오면 알아서 들고 와. 그런데 하드웨어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캐논 MarkⅣ도 시장에 나오면 나한테 가져올 거야.”

―MarkⅣ는 고감도에서도 노이즈가 많이 없답니다. ISO 3200 정도까지 깔끔하고 상용감도는 ISO 12800까지 확장감도는 ISO 102400이라는데요.

약간 전문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박 회장은 막힘 없이 대답했다.

“캐논 7D도 ISO 1600에서는 거의 노이즈가 없던데? ISO 3200까지 괜찮다면 올해 밴쿠버에 가져가야겠구먼. 사람의 눈이 ISO 10000이라고 하던데 사람 눈보다 낫네.”

―사진은 단순 취미인가요? 누구는 창조적 경영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고….

“무슨…. 시간 죽이고. 걸어도 카메라 메고 걷는 게 그냥 걷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 이 친구들하고 지리산 올레길 한 번 갔다 왔거든. 이틀 걸었는데, 그냥 털레털레 걷는 것보다 꽃도 찍고 경치도 찍으니 얼마나 좋아요.”

―요즘 중앙대 일로 바쁘시죠? 불시에 사진학과 들르셨다던데…

“너무 오래된 브라운관 모니터로 실습을 하더라고. 아주 비싼 350만 원짜리 트루컬러 그런 건 아니더라도 액정표시장치(LCD) 모니터로 바꿔주자고 생각했어요. 내가 미술은 잘 모르지만 예전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피카소미술관에 간 적 있어. 근데 피카소가 어려서 그린 것이 요만한데 딱 그림엽서만 해. 가까이서 봐도 아주 세밀하게 잘 그렸어. 과거에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 추상으로 넘어가더란 말이지. 요새 우리 사진 찍는 애들이 1, 2년 사진 찍고 나면 이상하게 포토샵으로 사진을 바꿔. 이건 잘못됐다 이거지. 사진의 장점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세세하게 표현하는 것 아냐? 물론 주제에 따라, 뭘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하지만 그걸 배우기도 전에 포토샵으로 ‘사진 찍어준다’고 하는 건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사진학과 선생님들은 나더러 헛소리하지 말라고 해. (내가 보기엔) 사진의 좋은 점은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건데…. 미술은 색이 안 맞으면 바꿀 수 있지만 사진은 못 바꿔. 사진 갖고 장난치면 안 돼.”

(박 회장이 문제 삼는 ‘포토샵’은 기본적인 수정이 아니라 사진 전체를 뜯어 고치는 개조작업을 뜻한다).

―그래도 현대 미술에선 포토샵을 이용한 사진, 즉 메이킹 포토(making photo)가 주류로 인정받지 않습니까?

“글쎄 나는 그게 별로…. 내 방에 우리 집 애들이 생일선물로 준 게 있는데…. 무지하게 비싸게 줬어. (아마도 사진 작품인 듯) 포토샵으로 만든 거래….”

―디지털 사진은 포토샵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건 그러니까, 나는 안 해. 능력도 없고 더구나 적록색약이거든. 내가 컬러 수정하면 이상하게 돼. 전문가가 있어, 그 사람더러 해달라고 하지. 난 찌그러진 거나 펴고 트리밍이나 조금 하고.”

―국내에서 개최된 매그넘 사진전에서 그 멤버인 이언베리 씨를 만났을 때 무슨 얘기를 나눴나요?

“당신이 보고 찍은 경치 당신이 즐기면 되지. 거기서 뭘 찾으려 그러느냐고 하더군. 그 친구는 디지털카메라를 아예 안 갖고 다니더라고. 자기도 이제 디지털로 넘어와야 하는데 아직까지 (필름 카메라를) 고집한다는 거야. 사진기자들이 기관총 쏘듯 찍는 사진과, 한 장 한 장 정성 들여 찍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했더니 자기도 잘 모르겠대. 근데 특히 인물 찍을 때는 연속촬영을 해야지. 눈 감으면 어떻게 해요? 내 동기가 김희중(에드워드 김)인데, 걔도 그래. 자기가 보기 근사한 거 찍으면 됐지, 심미가 어쩌고 헛소리하지 말라고 그래. 그 친구도 분명해요.”

―그럼 사진 연출은 안 하시겠네요?

“난 어디 가서 포즈 잡고 찍어 달라고 하면 사진 안 찍어줘요.”

―금년 말쯤 전시회 하셔야겠어요.

“전시회는 무슨? 붓글씨 쓰는 동기들은 연말 전시회를 한다는데, 얘들하고 같이 사진전 한다고 하면 누가 와서 봐요?(웃음)

그는 현재 두산중공업 회장, 대한체육회장, 중앙대 이사장 등 굵직한 타이틀을 갖고 있다. 재벌총수라는 생각에 긴장했던 사람도 그와 잠깐 대화를 나누면 자연스럽고도 소탈한 화법에 금방 빠져들고 만다. 친한 동네 아저씨와 얘기하는 것 같다.

정리해 보면 그는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찍고 싶을 때 찍고, 회사에 자기 사진으로 힘을 보태고, 트레킹 가서는 주변 친구들과 사진으로 대화한다. 한마디로, 인생 전반에서 ‘카메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눈이 발달한다. 웃을 때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조그만 눈이 조금 더 작아진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지니. 그 작은 눈 사이로 뿜어 나오는 안광과 빠른 말투를.

카메라를 통해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는 박용성 회장. 그는 고희를 지난 원로라기보다 생각이 젊고 판단이 빠른 진취적 경영자였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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