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이기홍]우상이 이성을 누르는 한미관계

  • 입력 2009년 10월 5일 02시 58분


코멘트
다음 주면 귀국이다. 3년여 만이다.

환송모임에 가면 “낮밤을 바꿔 사느라 힘들었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낮에는 워싱턴의 리듬에, 밤에는 서울의 마감시간에 맞춰야 하는 특파원 생활에 대한 위로성 인사말이리라. 하지만 돌이켜보면 정작 힘들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3년간 독백처럼 가끔 떠올린 단어가 ‘우상과 이성’이었다. 386세대에게 영향을 줬던 책 제목에서 연상된 표현이다.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우상과 이성’(이영희 저)을 비롯한 이념 서적들이 준 충격은 컸다. 중국 공산혁명, 베트남 전쟁 등에 관한 또 다른 시각은 주입식 반공교육이 만들어 낸 허상을 일깨워줬다.

그러나 그 후 차츰 더 다양한 시각의 책과 자료들을 접하면서 좌파 사회과학 책들 역시 정반대 방향에서 우상을 강요하는, 어쩌면 더 지독한 역편향의 산물임을 깨달았다. 좌우 양측 모두에 자신의 우상을 강요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남을 알게 됐다.

돌이켜보면 지난 3년간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서도 숱한 허상들이 춤을 췄다. 허깨비의 미국이 서울에서 진실 행세를 하곤 했다.

미국인들이 무심히 식탁에 올리는 미국산 쇠고기는 극약보다 위험한 광우병 덩어리로 둔갑했다. 1960, 70년대 독재정부가 ‘뿔 달린 북한 괴뢰’를 만들어 냈듯, 21세기 일부 언론과 좌파단체는 광우병 괴담을 퍼뜨렸고 이성(理性)은 무력했다. 그 후 우상 조작의 실체가 벗겨졌지만, 여전히 한국시장에선 미국산 쇠고기가 맥을 못 춘다고 한다. 광우병 공포에 깊게 젖었던 자녀들이 여전히 불안해하는 바람에 엄마들이 구매를 꺼린다는 게 통상전문가의 분석이다. 힘줄처럼 질긴 상징조작의 힘을 보여준다.

외교안보, 북핵문제에서도 진실이 태평양을 건너는 건 쉽지 않았다. 2006년 여름 부임 직후 놀랐던 게 노무현 정부에 대한 워싱턴의 깊은 불신과 회의였다. 주로 민주당(미국) 성향의 인사들을 만났는데도 다들 노무현 정부에 대해 고개를 흔들며 한미관계를 걱정했다. 하지만 ‘자주’를 우상시하는 청와대와 진보그룹은 그런 목소리를 “수구 세력의 발목잡기용 왜곡보도”라며 폄하했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자 서울의 ‘햇볕’ 숭배자들은 오바마가 당장이라도 평양으로 달려갈 것처럼 떠들면서 “한국이 오리알 신세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바마 캠프 인사들은 한결같이 “한미공조가 최우선”이라고 말하는데도, 서울 일각에선 가공(架空)의 워싱턴 기류를 들이대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 정책 기조로의 복귀를 요구했다.

8월 초 빌 클린턴 방북 때도 미국은 “철저히 인도주의적 목적”이라고 강조했지만 서울에선 북-미 대타협의 변혁이 닥쳤다고 소리쳤다. 지금도 오바마는 서두르지 않으면서 대화와 제재 병행이라는 원칙 아래서 움직이고 있건만 한국 일각에선 ‘오바마는 왜 서둘러 급선회했나’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그런 현상에 대해 오바마 캠프 외교안보 자문 멤버였던 고든 플레이크 맨스필드재단 사무총장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바꾸라는 압력을 넣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개입돼 있다”는 해석을 내놨다.

서울과 워싱턴은 비행기로 한나절이면 닿고 매일 수많은 사람이 오가건만 사실이 사실 그대로 태평양을 건너기는 쉽지 않을 때가 많다. 별자리 잇기를 하듯이, 수많은 팩트(사실)를 자의적으로 짜깁기해서 ‘요즘 미국은 이렇다’고 주장하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정작 사람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건 낮밤이 바뀐 생활 같은 물리적인 요인이 아니라, 우상이 이성을 압도하는 걸 바라봐야만 했던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