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현모]세종이 실천한 ‘親서민정책’

  • 입력 2009년 8월 31일 02시 59분


이명박 대통령의 친(親)서민정책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이미 실패한 정책을 왜 다시 꺼내느냐고, 노무현 정권이 그 정책 탓에 선거에서 패한 일을 벌써 잊었느냐고 비판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 추락과 선거의 패배는 그가 친서민정책을 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이 서툴렀던 데 원인이 있다.

나랏일, 사회적 약자부터 배려

우리 역사에서 친서민정책을 가장 잘 실천한 임금은 세종대왕이다. 그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기르는 데 있으니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것이 나라 다스리는 급선무다”라고 해, 최고지도자는 마땅히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기르고(養民) 풍족하게 하는(厚民) 일을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종이 민생을 우선시했다고 해서 그를 곧 ‘백성 뜻 영합주의자’로 봐서는 곤란하다. 그에 따르면 ‘서민(庶民)의 마음은 일정하지 않아서 흡사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것처럼 왔다 갔다 하며 ‘실로 신명한 존재(神明)’이나 동시에 ‘지극히 어리석기도 하다(至愚)’. 따라서 지도자는 ‘대중의 불일치한 말 중에서 지당한 하나의 결론’, 즉 신령스럽게 밝은(神明) 마음을 찾아내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세종은 어떻게 백성의 신명한 마음을 찾아서 실천했는가.

첫째, 그는 나랏일을 결정할 때 사회적 약자들이 그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먼저 고민했다. “하늘이 만물에게 차별 없이 혜택을 베풀 듯 국왕도 모든 신민에게 고루 은택을 주어야 한다”면서 노비나 감옥의 죄수, 그리고 외로운 노인과 버려진 아이들이 그 결정으로 인해 겪게 될지도 모르는 아픔을 먼저 생각하고 대책을 마련하게 했다. 건강한 가정에서 가족 중 가장 취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우선 배려 받는 것처럼 백성의 부모인 임금도 그들의 말 못할 사정을 헤아려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둘째, 인재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일을 위임하는 데 부지런했다. 그는 힘없는 백성의 원통한 목소리를 듣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동시에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고 위임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효를 내도록 했다. 백성을 위하는 일은 말뿐 아니라 일로써, 결과를 가지고 섬겨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온갖 스캔들로 초반부의 관력이 얼룩졌던 황희를 정승으로 발탁해 24년간이나 ‘귀신같은 국정의 해법’을 내놓게 한 일이 그 예다. 재상들이 평균 6.8년씩 한곳에 장기근무하며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인사원칙 덕분이었다.

상세하고 명확하게 정책 설득

셋째,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재위 중반기에 4군6진을 개척할 때 자신의 팔을 자르거나 자살하는 등 격렬히 저항하면서 북방 이주(徙民)를 거부하는 백성이 많았다. 궁극적으로는 백성을 위하는 일이긴 하나 당장에는 백성을 고통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은 “조종의 땅은 단 한 뼘의 땅이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워 당시의 떠도는 말(浮言)을 물리쳤고 결국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의 변경으로 만들었다. 그는 결론이 정해지면 그 정책이 왜 중요한지, 지금 추진하지 않으면 조만간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는지를 ‘상세하고 명확하게 일깨워가는’ 일을 정성스럽게 해나갔다.

조만간 광화문광장에 가면 세종대왕 동상과 함께 ‘세종이야기’ 전시관을 만나게 된다. 나는 전시관 중에서 특히 ‘민본공간’에 관심이 간다. 그 공간은 백성을 배려하고 인재를 등용해 결과로써 백성을 섬겼던 세종의 친서민정책을 느끼는 ‘대한민국 정치의 첫 순례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현모 한국학 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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