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작가]소녀그룹 전성시대

  • 입력 2009년 8월 22일 02시 58분


소녀들의 시대다. 단언컨대 이렇게 가요계에 걸파워가 강했던 적이 없다. 2007년 하반기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잇달아 등장한 건 예고편에 불과했다. 하나의 대세가 성립되면 우후죽순처럼 따르는 게 한국 가요계의 생리라지만 남자 가수들은 다 어디 갔는지 궁금할 정도다. 그리고 그 대세 안에서 보통 둘, 잘해야 셋 정도만이 존재감을 가지는 게 시장의 룰이었는데 최근의 걸그룹은 모두 자신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으니 또한 이채롭다.

섹시-청순 벗어난 다양한 캐릭터

몇 년 전만 해도 ‘걸그룹은 안 된다’는 게 가요계의 불문율이었다. H.O.T.가 등장하며 아이돌의 시대가 개막된 이래 가요계의 헤게모니를 쥔 건 늘 보이그룹이었다. 물론 S.E.S.와 핑클처럼 큰 성공을 거둔 걸그룹도 있었지만 그 성공률은 보이밴드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돌의 팬, 즉 시장의 수요자는 대부분 10대 소녀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리고 반응하는 건 보이그룹이었지 걸그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걸그룹에 환호하는 남자들은 그들에게 돈을 쓰지 않았다. 수요는 있되 매출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의 성공은 그런 불문율을 단숨에 깨뜨렸다.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전략도 달라졌다.

가요계에서 여성의 캐릭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섹시와 청순. 댄스 여가수들의 전매특허는 섹시 콘셉트였다. 걸그룹의 시대가 오기 전, 누가 더 많이 벗나 경쟁이라도 하듯 섹시 콘셉트를 앞세웠던 여가수가 얼마나 많았던가. 발라드를 부르는 가수들은 예외적으로 청순한 캐릭터를 내세우곤 했다. 그 외의 다른 캐릭터를 찾기란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걸그룹들은 실로 다양한 캐릭터를 내세워 대중을 공략하고 있다. 여기에는 노골적인 섹시함도, 지루한 청순함도 없다. 극단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는 팬뿐 아니라 안티팬도 많이 양성하는 법이다. 섹시 여가수 붐이 불었을 때 얼마나 많은 ‘악성댓글(악플)’이 달렸는지를 생각해보라. 반면 걸그룹은 극단적인 캐릭터를 내세우지 않는다. 대부분이 미성년자라는 조건도 있지만 굳이 노골적인 섹시함을 내세우지 않아도 매력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솔직함과 건강함이라는 틀 안에서 때로는 주책없고 수다스러우며 엉뚱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틀에 박힌 연예인’에서 ‘예쁘장한 옆집 동생’의 존재로 다가온다. 여성 캐릭터에 현실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건 활동의 중심이 가요 프로그램에서 예능 프로그램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중심은 음악도, 영화도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이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예능 프로그램에서 벌어진 일들이 화제가 되는 것이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걸그룹이 보여줄 수 있는 건 사전에 짜인 노래와 춤뿐이다. 몇 번을 출연해도 연출만 바뀔 뿐 기본적인 포맷은 정해져 있다. 시청자 층도 제한돼 있다.

달라진 음악시장의 성공사례로

그러나 예능 프로그램은 다르다. 가수가 아닌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보여줄 것도 많다. 굳이 말재주가 있거나 개인기가 뛰어나지 않아도, 미모로 종종 ‘반응’ 샷을 차지할 수도 있다. 방송 쪽에서는 데뷔 전부터 충분히 트레이닝을 받은, 준비된 출연자인 데다 그림도 좋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고 걸그룹 쪽에서는 대중에게 다양한 캐릭터를 각인시킬 좋은 기회니 서로 윈윈 한다. 게다가 아이돌의 경우 활동의 단위가 정규 앨범에서 디지털 싱글 형태가 되면서 신곡으로 활동할 수 있는 횟수가 잦아졌다. 방송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방송 환경의 변화는 그들에게 폭넓은 연령층의 팬도 안겨줬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성공적인 데뷔를 했을 때 아이돌 시장과 무관할 것만 같았던 중년 남성층까지도 그들에게 열광했다. 새로운 시장이 개척된 것이다. 동방신기 같은 ‘실력파 아이돌’, 빅뱅 같은 ‘다크 아이돌’, 샤이니처럼 ‘누나 부대용 아이돌’까지 보이밴드 시장이 세분되고 포화상태를 이룬 상황에서 그동안 미개척 영역으로 남아있던 걸그룹 시장이 결국 열린 것이다. 걸그룹은 음반과 콘서트라는 전통적인 형태의 시장이 아닌 새로운 시장에서 강세를 보인다. 통화연결음이나 벨소리, BGM 같은 디지털 음원 시장, 그리고 행사가 그것이다. 걸그룹의 주된 팬 층인 남성은 음반과 콘서트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지출을 하는 반면 디지털 음원을 부담 없이 소비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행사 출연진을 결정하는 이들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사실은 행사 시장에서 걸그룹들이 높은 인기를 누릴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달라진 방송 환경, 달라진 음악 시장에서 걸그룹은 어쩌면 예견된 히트 상품이었을지도 모른다.

걸그룹 르네상스는 얼마나 지속될까. 대부분이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탓에 선뜻 예측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류가 아닌 오리지널 캐릭터를 확립하는 팀이 살아남는다. 한국 가요계의 역사를 모두 되짚어 봐도, 아류가 살아남은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데뷔 초기의 신선함이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기량을 검증받을 즈음, 그들의 유효기간이 드러날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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