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고객이 가격을 정하면 기업이 망한다?

  • 입력 2009년 4월 4일 02시 55분


고객에게 가격 결정권을 100% 위임해도 기업이 생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공정성을 추구하는 심리 때문에 고객들이 일정 수준의 가격을 자율적으로 지불하기 때문이다.
고객에게 가격 결정권을 100% 위임해도 기업이 생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공정성을 추구하는 심리 때문에 고객들이 일정 수준의 가격을 자율적으로 지불하기 때문이다.
■ 獨 대학, 소비자가격 모델 연구

“고객 마음대로 값 치르게 해도

대부분 합리적 수준에서 지불

흥미 유발해 매출 되레 늘기도”

만약 한 식당이 “고객들이 원하는 만큼만 밥값을 내라”고 선언하면 어떻게 될까? 고객들은 아예 돈을 내지 않아도 되고, 1만 원 혹은 10만 원을 내도 된다. 이 식당은 고객들의 ‘무전취식’으로 결국 망하게 될까?

고객이 원하는 만큼 돈을 내게 하는 가격 정책을 ‘PWYW(Pay What You Want)’라고 부른다. 세계 최고 마케팅 학술지인 ‘저널 오브 마케팅(Journal of Marketing)’ 최근호(2009년 1월호)에는 PWYW를 실시하더라도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실험 결과가 실렸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의 마틴 내터 박사 등이 주도한 연구 결과 PWYW를 실시한 일부 업체에서는 매출이 늘어나기도 했다.

○ 고객이 가격 결정해도 기업 망하지 않아

통상 가격 결정권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이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소비자가 가격 결정에 참여하는 혁신적 모델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경매다. 경매에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가격을 제시하고 판매자가 가장 높은 가격을 수용한다. PWYW는 이보다 훨씬 혁명적이다. 경매에서 소비자는 가격 결정 과정에 일부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그치지만 PWYW에서는 가격 결정권을 몽땅 고객이 갖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프랑크푸르트 시내 한 뷔페식당에서 고객들이 마음대로 밥값을 내게 했다. 평소 이 뷔페식당 이용 가격은 7.99유로. PWYW 도입 후 고객들은 평균 6.44유로를 지불했다. 순전히 경제 논리로만 보면 고객들은 돈을 한 푼도 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실험이 진행된 2주 동안 고객들은 꽤 높은 가격을 지불했으며 매출도 평소보다 32%나 늘어났다. 새로운 가격 정책에 흥미를 느낀 고객들이 식당을 더 자주 찾았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영화관과 음료 가게에서도 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영화관의 평균 티켓 가격은 6.81유로였는데, PWYW 정책을 시행한 후 고객들은 평균 4.87유로를 지불했다. 음료 가게에서는 PWYW 시행 전 평균 판매 가격이 1.75유로였는데,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지불한 가격은 평균 1.94유로로 오히려 높았다. 뷔페식당과 달리 영화관은 외부에 가격 정책 변경을 홍보하지 않아 매출이 줄었다. 반면 음료 가게는 3% 정도 매출이 늘어났다.

PWYW의 효과가 드러나자 실험 대상이 됐던 뷔페식당은 아예 이 방식으로 가격 정책을 바꿔버렸다. 논문 저자들은 실험 후 몇 달이 지났지만 이 식당은 여전히 장사가 잘된다고 전했다.

연구팀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영업하는 파키스탄 식당인 ‘비엔나 디완’이 2005년 4월부터 PWYW를 시행했는데 수익을 내왔다고 설명했다. 또 영국 출신의 모던록그룹 ‘라디오헤드’는 고객들이 인터넷으로 앨범을 내려받고 마음대로 돈을 지불하게 했다. 그 결과 200만 명 이상의 고객이 앨범을 다운로드했고 수익을 내는 데도 성공했다.

○ 공정성을 추구하는 심리가 원인

사람들은 왜 공짜로 즐길 기회를 마다하고 상당히 합리적인 수준의 가격을 지불하는 것일까. 연구팀은 ‘최후통첩 게임’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두 사람이 참여하는 이 게임에서 한 사람은 1만 원 가운데 자기 몫과 상대방이 가질 몫을 제안한다. 상대방은 이 돈을 받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제안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9999원을 갖고 상대방이 1원을 갖는 안을 제시하는 게 가장 경제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상당수 제안자는 비교적 공평한 수준에서 돈을 나눠 갖겠다고 제안했다. 또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1원이라도 챙기는 게 이익이지만, 8 대 2나 9 대 1처럼 불공정하다고 판단되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과감하게 거절했다. 인간이 공정성을 추구하는 심리를 갖고 있다는 게 이 게임으로 입증됐다.

물론 프랑크푸르트대 연구팀의 실험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독일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지역적, 문화적 특성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 업종과 산업에 따라 PWYW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파격적인 가격 정책도 상황에 따라 성공할 가능성이 있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남국 기자 mar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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