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짝퉁 대통령시계

  • 입력 2009년 4월 3일 03시 02분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고 며칠 후 기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취재를 갔다가 눈을 의심했다. 대선 과정에서 민자당이 불법으로 살포해 논란이 됐던 이른바 YS시계(‘03시계’라고도 했다)를 손목에 찬 선관위 직원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면 하단엔 ‘金泳三’, 뒷면엔 ‘大道無門’이라는 YS의 친필 휘호가 새겨진 시계였다.

궁금해서 한 간부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그는 멋쩍어하면서 “아, 그거요? 내가 민자당에 부탁해서 좀 보내달라고 했어요. 기념으로요. 이젠 ‘대통령 시계’잖아요”라고 솔직히 털어놨다. 대선 직전까지 단속 대상이었던 YS시계가 하루아침에 대통령 당선인의 기념품으로 격상된 어이없는 현실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새 대통령 시계 한번 차보자’는 선관위 직원들을 엄격한 잣대로 비판만 할 수는 없었다. 문민정부 출범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한껏 높았지만 아직은 대통령을 우러러보는 권위주의 시대의 그늘이 짙던 때였으니까.

17년 전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는 건 최근 청와대가 가짜 ‘이명박 시계’에 대한 수사를 검찰에 의뢰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문제의 시계엔 청와대가 제작한 진짜 시계처럼봉황 문양과 이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시계는 제작 단가가 1만8000원 정도인 비매품으로 값비싼 명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짝퉁이 나도는 것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가짜 시계를 차고 다니며 대통령 측근이나 유력 인사로 행세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기념 시계를 만들었다. 취임 등을 기념해 측근, 지지자들에게 나눠주거나 청와대를 방문하는 내외빈에게 선물하는 용도였다. 이런 시계를 차는 사람들이 시계의 가격 품질과는 상관없이 ‘대통령 시계’라는 데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대통령과의 친분, 인연을 은근히 과시하는 데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대통령 시계가 ‘완장 효과’를 내는 건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높을 때뿐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초기엔 대통령 시계를 찬 사람이 제법 눈에 띄었지만 잇단 실정으로 민심이 떠난 뒤에는 여권 인사들조차 이를 외면했다. 염량세태를 탓할 것인가. 국민에게 욕 먹는 대통령의 시계를 차고 다니다간 눈총만 받을 텐데….

청와대 일각에선 짝퉁 ‘이명박 시계’의 등장에 “요즘 대통령 인기가 올라가서 그런 모양”이라는 반응이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의 창간 89주년 기념 여론조사에서도 이 대통령의 지지도는 36.8%로 나왔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완만한 회복세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지도 등락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달렸다.

이 대통령이 기념 시계를 처음 선물한 대상은 지난해 4월 6일 청와대로 초청한 환경미화원 196명이었다. 그들은 시계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잊지 않는 대통령의 마음에 더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경제위기로 실의에 빠진 이웃이 참 많다. 이 대통령이 그런 국민의 고통을 진심으로 헤아리고 덜어주기 위해 노력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이 대통령의 시계가 좋은 기념품으로 남을 것인지는 그 결과에 달려 있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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