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육정수]사법부 흔드는 판사들의 가벼운 입

  • 입력 2009년 2월 28일 03시 03분


판사만큼 입을 조심해야 하는 직업도 드물 것이다. 모든 재판에는 양측 당사자가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 말하면 한쪽을 편드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법정에서 변호사와 피고인 증인 등에게 반말을 쓰거나 고압적 자세를 보이고, 변호사에게 “사법연수원 몇 기냐. 어디서 그 따위로 배웠느냐”며 인격모독을 하는 사례까지 있다고 한다. 오죽하면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법관평가제를 실시하게 됐을까 하는 지적도 나온다.

개인적 의견표명, 사법중립 저해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오랜 금언(金言)이 흔들리고 있다. 판사는 곧 맡게 될 가능성이 있거나 진행 중인 재판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 정도(正道)다. 판사가 특정 사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함부로 하면 법원 안팎에서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고 결국은 사법부의 중립성과 공정성, 신뢰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사법부가 지금 무척 시끄럽다. 일부 판사가 재판에 관한 의견을 대외적으로 표명하고 있어서다. 인터넷 세대로 분류되는 자유분방한 젊은 판사가 늘어나면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개인적인 의견 노출을 자제하도록 전국 법관들에게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판사들의 의견 표명을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건전한 제언과 일반적인 법률이론에 관한 의견은 사법부 발전과 판사들의 전문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 또는 반대하거나 정치적 이념과 관련된 의견을 밝히는 것은 문제가 있다. 최근 사직한 박재영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불법 촛불시위 주도 및 경찰관 폭행 혐의로 구속된 안진걸 씨(광우병국민대책회의 조직팀장)를 작년 8월 보석으로 풀어줬다. 그 이유로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고, 합법적 시위에만 참가하겠다고 한 약속을 철석같이 믿는다”고 밝혔다. 박 판사는 야간 옥외집회를 금하고 있는 집시법 제10조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도 제청했다. 여기까지라면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른 판사의 재판권한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박 판사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개인적 감정과 견해를 드러냈다. 안 씨에게 “(촛불시위의) 목적이 아름답고 숭고한데… 대안이 없었을까요”라고 물으면서 “개인적으로 법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 입장에서…”라고 말했다. 피고인의 동지(同志)로 행동하고 싶다는 속내를 내보인 것이다.

박 판사는 궤도를 계속 이탈했다. “미네르바 구속을 보면서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큰 충격을 받았다” “공직자로서 용산 참사를 보고 큰 괴로움을 느꼈다” “내 생각들이 현 정권의 방향과 달라서 공직에 있는 게 힘들고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이미 그는 법복을 입을 자격을 스스로 잃고 말았다. 사회정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나 판사로서의 올곧은 소신을 피력한 것으로 볼 수도 없게 됐다.

좌파와 반정부세력에 힘 실어줘

그의 태도는 검찰 경찰의 공권력 행사가 부당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촛불시위자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다른 재판부의 유죄판결을 ‘정치적 재판’으로 매도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했다. 미네르바 구속과 용산 참사에 대한 감정 표현은 일부 좌파 또는 반정부세력의 ‘독재 정권’ ‘살인 정권’이란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판사의 현실인식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촛불시위사건 배당과 관련해 최근 서울중앙지법 일부 판사가 하고 있는 의견 표명도 좀 더 신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촛불시위 사건들을 초기에 특정 판사에게 몰아준 것을 중벌(重罰)에 처하기 위한 정치적 동기가 개입된 것으로만 봐야 했을까. 같은 유형의 사건들을 균형 있게 판결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법원 측의 설명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젊은 판사들이 판결로만 말하라고 가르치던 선배 판사들의 진정한 뜻을 되새겨보았으면 한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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