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31>

  • 입력 2009년 2월 17일 13시 56분


"뇌는 도착했어?"

석범이 숨을 헐떡이며 방으로 들어섰다. 사체 추정 생명체와 접촉한 사람은 메디컬 존에서 정밀검진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앨리스와 석범 모두 음성 판정이 나왔다. 개꼬리의 사체가 발견된 폐기물 처리장으로는 성창수와 지병식 형사가 갔다.

"네. 스티머스 분석 결과가 10분 후면 나옵니다. 사건 현장부터 우선 보시죠."

앨리스는 성형사가 보낸 실시간 영상을 튼 후 석범 옆에 나란히 앉았다.

폐기용 로봇이 산처럼 쌓인 원경(遠景)은 괴기스러웠다. 특별시 곳곳에서 쉼 없이 일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는 부서지고 녹슨 고철 신세였다.

개꼬리의 사체도 고철 더미에 놓여 있었다. 화면이 클로즈업으로 다가갔지만, 석범은 그것들이 사체인 줄 몰랐다. 79퍼센트의 기계몸이 낱낱이 분해되어 널렸던 것이다. 부품별로 흩어놓으니 사람의 기운이라고는 없었다. 잘린 머리가 기계 뒷다리 아래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개꼬리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으리라. 범인은 개꼬리의 목숨을 앗은 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몸을 뜯고 자르고 베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기계몸을 하나하나 해체하는 것은 단순 살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반인반수족만 골라서 죽인다는 자연인 그룹 짓인가. 몇몇 반인반수족이 참혹한 최후를 맞았지만 이런 몰골로 발견된 적은 없었다.

"사망 추정 시각은 오늘 새벽 5시에서 7시 사이입니다."

"5시에서 7시라면, 우리랑 맞붙고 나서 얼마 뒤 살해당했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또 그 꽃뇌 역시 비슷한 시각에 숨을 거두었다는 감식결과가 방금 나왔습니다."

앨리스는 뇌 대신 꽃으로 두개골을 채운 시신을 '꽃뇌'라고 불렀다.

"스티머스부터 보자구. 어서 켜봐."

앨리스가 스티머스를 작동시켰다.

시간이 흘러도 화면에 잡히는 것은 붉은 천이 전부였다. 앨리스가 단발머리를 휘저어댔다.

"뭐야 이거…… 붉은 천만 바라보다가 죽었단 말이야?"

석범이 침착하게 받았다.

"정확히 지적하자면, 붉은 천만 바라보도록 강요당하다가 살해되었지."

"강요당했다고요?"

석범이 영상의 좌우 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잘 봐. 화면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만 왔다 갔다 할 뿐 그 너머로는 못 가지? 30도 이상 고개를 좌우로 돌릴 순 없단 뜻이야."

"머리를 고정시킨 채 붉은 천을 쳐다보게 만들었단 것이군요. 뭣 때문에 그랬을까요?"

앨리스의 초록 눈에는 불안한 빛이 가득했다.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은 하지만 자기 입으로 발설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석범이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답했다.

"우릴 조롱하고 싶었던 거겠지."

"조롱이라면, 기밀이 누설되었단 말입니까? 대체 누가……."

석범이 말허리를 잘랐다.

"물증 없는 속단은 금물이야."

앨리스는 추측의 나래를 접지 않았다.

"혹시 꽃뇌도 같은 놈 짓이 아닐까요? 마지막 기억을 붉은 천으로 씌우는 짓이나 아예 뇌를 떼어가는 짓이나 수사방해는 마찬가집니다."

석범도 계속 그 부분이 걸렸다.

동일범이라면? 이건 연쇄살인이다. 왜? 무엇 때문에? 꽃 들판에서 발견된 시신은 반인반수족도 아니다. 지금으로선 둘 사이에 공통점이 없다.

"일단 기다려보자고. 두 사건이 우연히 연달아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고."

"뭘 더 기다리죠? 놈이 또 누군가를 이번엔 푸른 천을 바라보게 한 후 죽일 때까지 기다립니까?"

앨리스가 씩씩거렸다. 그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스티머스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지 않았으니 살인범 추격은 힘들다는 것을.

"개꼬리 신원은 나왔나?"

석범이 화제를 바꿨다.

"벌써 뒤졌죠. 근데 깨끗해요. 기계팔을 달았으니 손목혈관 쪽은 조사하기 글렀고 두 눈도 모두 인공안굽니다. 범법자 DNA 목록과도 대조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석범이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았다.

"개꼬리 말고 소꼬리에 관한 몇몇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하복부에 장착된 라이프 로그 칩을 분석한 결과 유전형질연구소가 아니라 보안청 메디컬 존에 여러 차례 접속한 기록이 잡혔습니다."

"메디컬 존? 접속해서 무슨 짓을 했는데?"

"그게, 워낙 잔기술을 많이 부려놔서 단번에 파악하긴 어렵답니다."

점점 더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배가 쓰렸다.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났다.

"개꼬리 사진을 일단 사망자등록청에 넘겨. 누가 알아? 사이보그 거리에서 어울리던 벗이라도 꼬리 흔들며 찾아올지? 여기까지만 정리하고 어디 가서 한 술 뜨자고. 성형사 지형사도 현장에서 철수하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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