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2년 독립운동가 이회영 순국

  • 입력 2008년 11월 17일 02시 49분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이 한밤에 남편은/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외투 쓴 검은 순사가/왔다-갔다-/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김동환의 시 ‘국경의 밤’에서)

약 100년 전 그들의 도강(渡江)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심경도 이랬을 것이다.

국권을 상실하고 4개월이 지난 1910년 12월, 한국인 40여 명이 엄동설한에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우당 이회영(1867∼1932) 6형제의 일가권속(一家眷屬)들. 서울을 출발하기 전 노비들을 해방했으나 모두들 기꺼이 수행을 자청해 인원이 늘어난 것이다. 무사히 강을 건너자 이회영은 뱃사공에게 뱃삯보다 두 배나 많은 돈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강을 헤엄쳐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해서 그들을 배에 태워 건너게 해주시오.”

일행은 신의주와 중국 단둥(丹東)을 거쳐 간도 땅인 류허(柳河) 현에 터를 잡았다. 이들의 망명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회영은 삼한갑족(三韓甲族·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인 경주 이씨 백사공파 출신이다. 백사공파는 이항복 이래 8대에 걸쳐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 이회영의 아버지도 이조판서였다. 광복 후엔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이 되어 그 명성을 이어갔다.

그런 이회영이 조국의 독립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황량한 만주로 떠난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엄청난 재산을 모두 처분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그 액수가 지금의 600억 원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1918년 갖고 온 자금이 바닥나면서 이회영 일가의 삶은 힘겨워졌다. 끼니를 잇지 못하기가 일쑤였고 빈민가를 전전하며 연명해야 했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이들의 독립운동은 그칠 줄 몰랐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회영은 1932년 11월 만주 일본군사령관을 암살하기 위해 배를 타고 상하이(上海)에서 다롄(大連)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리곤 혹독한 고문 끝에 1932년 11월 17일 차가운 이역 땅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우당의 6형제 가운데 이시영을 제외한 5명과 대부분의 가족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굶주림과 병,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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