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국회법 희롱하는 국회

  • 입력 2008년 9월 10일 20시 19분


1990년대 중반 영국의 선데이타임스 기자가 국회의원들의 청렴도를 알아보기 위해 함정취재를 시도했다. 유령회사를 만든 뒤 국회의원 수백 명에게 접근해 의정활동 중에 자신의 회사에 유리한 발언을 해주면 몇백만 원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딱 두 명의 의원이 이를 수락하고 돈을 받았다. 신문은 이를 사실 그대로 보도했다. 영국에서는 로비가 합법적이니 그 자체는 문제될 게 없지만 사전에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됐다. 의회는 이를 이유로 해당 의원에게 수개월의 감봉에다 등원금지 처분을 내렸다. 의원 두 명 중 한 명은 받은 돈을 사회복지단체에 기부했는데도 징계를 면치 못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1991년 국회 윤리특별위원회가 설치됐지만 지금까지 징계다운 징계가 내려진 적은 거의 없다. 우리 의원들이 영국 의원들보다 청렴도가 뛰어나서인가. 그런 것 같지 않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와 김재윤 민주당 의원만 하더라도 위중한 범법 혐의까지 받고 있는데 국회는 이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는커녕 스스로 이들을 보호하는 ‘방패’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법을 지키지 않는 데 있다. 국회법은 회기 중일 때 의원 체포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26조 2항에 ‘의장은 체포동의를 요청받은 후 처음 개의하는 본회의에 이를 보고하고, 본회의에 보고된 때부터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표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2005년 민주당의 사실상 전신인 열린우리당 주도로 체포동의안의 신속한 처리를 위해 신설한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번에 ‘야당 탄압’ 운운하며 동의안 처리에 반대하는 등 3년 전과는 딴판인 모습을 보였다. 김형오 국회의장도 제 소임을 다하지 않았고, 한나라당도 목청만 높였을 뿐 행동은 소극적이었다. 결국 체포동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해 사실상 처리가 무산되고 만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국회가 아닌가.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체포동의안의 본회의 자동 상정을 위한 국회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그래봐야 지키지 않으면 소용없다. 지금까지 여야가 국회법을 위반한 전과(前科)가 어디 한두 번인가. 개원 국회의 파행을 막기 위해 국회법에 개원일과 상임위 구성 등에 관한 시한을 명시해 놓았지만 수십 년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징계 결의나 의사진행 방해 금지, 인사청문회 개최 등의 사안들에서는 위반 사례가 너무 많아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지경이다.

한 국회 관계자는 “지금의 국회법은 법이 아니라 정당의 당규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지켜도 그만,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얘기다. 국회법은 ‘국민 대의기관인 국회의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운영에 기여하기 위해’(1조) 존재하건만 여야가 합의하지 않으면 아무 구실도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법을 붙잡고 규정 타령을 해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다.

국회는 의장 산하에 운영제도개선자문위원회를 설치해 ‘놀지 않는 국회’, ‘싸우지 않는 국회’, ‘소통의 국회’를 만들기 위한 여러 방안을 연구 중이다. 취지는 좋다. 그러나 어떤 제도든 당사자들이 존중하고 지키려 할 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제도 이전에 정치문화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다. 국회의원이라면 법을 만들기 전에 법을 지키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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