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逆說

  • 입력 2008년 6월 25일 02시 57분


역설적으로 촛불은 이명박 정부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

순수한 촛불일 때도 그랬고, 정치색을 띤 ‘횃불’로 변질된 이후에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초, 크고 작은 모임에서 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강부자(강남 부자),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인사에서 촉발된 불만은 전방위로 번졌다. “노무현(전 대통령)이 미워서 찍어줬는데, 자기가 좋아서 찍어준 줄 착각하더라” “권력을 잡은 뒤에는 말에서 내려야 하는데, 말 위에서 점령군처럼 통치한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친구는 “기업인의 생리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이다. CEO(최고경영자) 출신 대통령은 그래서 불안하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적 대통령제 아래서 대통령은 당선된 날 하루만 정상에 머문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바로 다음 날부터는 하산길이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겸허하며, 현명해야 한다. 집권세력이 대통령 취임 전부터 고압적으로 ‘민영화’니, ‘구조조정’이니 떠들어 방송과 공기업, 공무원 등의 위기의식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촛불이 양산된 데는 ‘먹을거리 우려’ 외에 이런 심리적 근저가 깔려 있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이 대통령은 ‘캄캄한 청와대 뒷산 중턱에 올라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보는’, 다소 감상적이지만 실존적인 고뇌에 휩싸이게 된다.

“대통령이 됐으니 국내엔 경쟁자가 없다”며 ‘경제 살리기’에 올인(다걸기)하려던 이 대통령으로선 억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 대통령제에선 대통령이라는 자리 자체가 정치의 핵이요, 정수(精髓)다. ‘경제 살리기에만 올인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깨달음이 있었던 것일까. 본보와 코리아리서치센터(KRC)의 23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청와대 전면 개편에 대해서는 과반수(57.7%)가 긍정 평가했다.

촛불이 아니었다면 앞만 보고 달려온 ‘불도저’가 ‘캄캄한 청와대 뒷산’에 오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임기 중반이나 말기가 아닌 초반에 청와대 뒷산에서 고뇌의 시간을 가진 것은 자신이나 국민에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6월 10일을 전환점으로 촛불의 정치색과 불법성이 짙어지고 있다. 일부 시위대의 불법·폭력성은 극렬한 좌우 대립기의 ‘횃불’마저 연상케 한다.

변질된 촛불도 역설적으로 이명박 정부를 돕고 있다.

본보·KRC의 23일 조사 결과 국민의 과반수(52.9%)가 쇠고기 추가협상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촛불시위는 이제 그만 해야 한다’(58.5%)고 답했다.

무엇보다 ‘도로 점거 등 불법과 일부 시위대의 폭력행위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63.5%)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촛불의 원동력이었던 20대 이하에서 이런 답변이 80%가 넘었다는 데 눈길이 간다.

500명도 안 되는 시위대가 나라의 얼굴인 광화문 세종로 사거리를 점거하는 날이 이어질수록 공권력 행사의 정당성은 커진다. 그러니 정부는 서둘러 불을 끄려다 다른 곳으로 옮아붙게 하는 우(愚)를 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집권 초 촛불이 이명박 정부에 도움이 됐다는 역설은 앞으로도 곱씹어봤으면 한다. 그래야 제2, 제3의 촛불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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