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돼지들의 순정

  • 입력 2008년 6월 19일 20시 00분


대통령이 두 번째 대국민 사과를 하기 전부터 시중의 반응은 벌써 나와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쪽이 “이만하면 됐다”며 이젠 갈등을 덮고 앞으로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면, 다른 쪽에선 “어림도 없다”며 예정대로 깃발을 쳐들 태세였다. 미국산 쇠고기 추가협상이 어떤 결과를 내놓더라도 마찬가지일 공산이 크다.

어느 편에 서든 기억해둘 점이 있다. 쇠고기와 촛불집회 광풍이 우리를 뒤덮고 있을 때 바깥세상에선 글로벌 경제 침체 말고도, 중국과 인도의 부상(浮上) 말고도,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왜 그들은 뒤처져야 했을까

이달 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유럽 경제가 20년 만에 미국과의 격차를 최소화했고 일자리는 더 많이 만들어 냈다고 발표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만성적 저성장 고실업이 민주제도를 위협할 수 있다”는 OECD 경고를 받았던 유럽이 구조개혁 덕에 되살아난 것이다.

이 속에 끼지 못한 나라가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나라의 머리글자를 합치면 ‘PIGS’, 돼지들이 된다. 한때 ‘클럽 메드’라고 불렸던 이 화려한 지중해 국가들을 최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여물통에 빠진 돼지들’이라고 했다.

이들 나라엔 공통점이 있다. 첫째, 마땅히 해야 할 개혁을 하지 않았다. 선거에 패할까, 인기를 잃을까 두려운 정치인들은 이익집단의 눈치를 보느라 노동시장 유연화, 생산시장 규제 폐지, 교육과 연금개혁을 안 하고 못했다. 지난해 개혁을 다짐하며 연임에 성공한 그리스 중도우파 정부도 1993년 개혁을 시도하다 좌파의 반대에 자파의 부패가 겹쳐 실권한 전력이 있다. 이번엔 과연 모험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둘째, 실업급여가 야박해 가족이 사회안전망 구실을 한다. 경제개혁은 1990년대 북유럽처럼 혹독한 경제위기를 겪거나, 2000년대 초 독일처럼 정권을 잃을 각오로 추진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사회안전망이 허술한 상태에서 개혁을 시도하다간 초기 어려움을 못 견디고 ‘개혁 피로증’만 일으킬 수 있다.

셋째, 게다가 법치마저 튼튼하지 않다. 사회지도층일수록 교통신호든, 계약이든, 세금이든, 모든 건 안면과 토론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탈리아에선 ‘규칙 엄수는 지성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면서 여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 PIGS의 부인할 수 없는 매력이 바로 법 대신 사람이, 논리 대신 정서가, 합리성보다는 열정이 더 많이 작용하는 순정파 나라라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순정이 마냥 통하는 시대는 갔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래 세계의 노동인구가 근 2배인 30억 명으로 급증하면서, 싫어도 글로벌 경쟁은 날로 심해지는 추세다.

유럽연합(EU) 국가 중 영국과 스페인 포르투갈을 제외한 24개국에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우파정부가 들어서서는 PIGS가 안 하고 못한, 당장은 고통스러워도 길게는 두루 이로운 개혁에 힘쓴 것도 살아남기 위해서다. 독일처럼 비정규직도 감수해 일자리를 늘리고 임금 삭감도 받아들여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자식 세대에 빚더미만 물려줄 판국이다.

선진국의 비전, 포기할 순 없다

이명박 정부는 유럽의 PIGS처럼 되지 않겠다고 구조개혁을 서두르려다 호된 역풍을 맞았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이 걱정스럽고, 대통령의 오만한 국정 운영 방식이 못마땅해 순수한 마음으로 촛불을 든 시민들이라면, 이제는 앞으로의 변화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기를 잉태해 낳는 데도 열 달이 필요한데 넉 달도 안 된 정권을 퇴진시킬 순 없다.

그래도 ‘직접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폭력 시위를 불사한다면 대통령이 내걸었던 경제 살리기를, 선진국가로 가자는 비전 자체를 거부하는 세력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사악한 의도를 가진 이들에게 쉽사리 농락당하는 게 순정이다. 진정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정부가 제대로 개혁을 하는지를 똑똑히 감시해야 할 때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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