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냄비, 괴담, 그리고 청계천

  • 입력 2008년 5월 30일 02시 59분


# 파리특파원 부임 초기 자동차보험을 들면서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서류 몇 장을 받았다. 서류 제목은 ‘자동차사고 합의조서(Constat Amiable d'Accident Automobile)’.

알아보니 경미한 교통사고를 낸 당사자들끼리 현장에서 합의해서 작성하는 사고경위서였다. 이 서류엔 사고의 발단, 경과, 책임소재 등을 써넣는 각종 기록란이 있다. 웬만한 접촉사고에는 경찰이 출동하지 않는 프랑스에서 이 서류는 교통사고 사후처리에서 강한 법적 효력을 갖는다.

이게 가능할까 싶었다. 경미한 접촉사고만 나도 뛰어내려 먼저 고함(심하면 욕설)부터 치고 보는 문화에서 살던 터였다. 당시 알고 지내던 프랑스 대학생에게 “프랑스에선 접촉사고 때 어떻게 싸우느냐”고 물었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형차를 몰던 그의 반문(反問). “사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당사자들이 서로 아는데 왜 싸우느냐?”

다행히 특파원을 마칠 때까지 합의조서를 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길가에 차를 옮겨놓고 조용히 합의서를 쓰는 프랑스인들을 보면서 씁쓸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우린 왜 저게 안 될까….’

# ‘고교 시절 선생님과 학교생활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한 재수생이 만든 ‘5·17 휴교’ 메시지가 30분 만에 전국에 퍼졌다. 이는 2008년 5월 한국의 조급증과 저열한 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인터넷 발달 때문이라고? 단연코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괴담은 뒷산 공동묘지 언저리에, 마을 어귀 저수지에, 여고 화장실에 머물러야 괴담이다. 30분 만에 전국에 퍼진 괴담은 괴담이 아니다. 사회 병리다. 우리 사회의 ‘참을 수 없는 냄비 체질’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의식이 이 병증(病症)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 괴담과 병리를 악용하려는, 정권교체의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정치세력까지 끼어들면 사회불안의 3박자를 갖추게 된다. 연일 청계천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촛불시위에 문득 이런 사회불안의 어두운 그림자가 비친다. ‘독재 타도’를 외치는 10대, 20대 청년들이 진짜 독재가 뭔지 경험해 봤을까.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밀어준 바로 그 청계천에서 반년도 안 돼 ‘독재자’로 둔갑한 것도 아이러니다.

# 2003년 유럽에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엄습했다. 이 폭염으로 유럽 전역에서 1만5000∼2만 명이 사망했는데 프랑스에서만 1만여 명의 노인이 죽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바캉스는 떠난다’는 프랑스에서 바캉스 시즌에 홀로 집에 남은 노인들이 피해자였다. 선진복지사회의 어두운 그늘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사후대응 방식. 한국 같으면 정권이 기우뚱거릴 일이었지만, 문책범위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아마 동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1년 뒤 다시 온 여름, 한 신문에서 ‘정부가 지난해 폭염의 대책을 발표했다’는 기사를 읽고 뒷골이 서늘해진 적이 있었다. 거기엔 △사고 원인 분석 △책임의 범위와 처리 결과 △노인보호 시스템 개선 결과 △향후 대책 등이 망라돼 있었다.

한국에선 일주일이면 뚝딱 대책을 발표하고, 1년 뒤면 모두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1년 뒤의 프랑스 대책에는 1년간 대폭 늘린 노인 요양시설 수 등 실제 개선 결과가 들어 있었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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