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세계 제일의 한강 분수

  • 입력 2008년 5월 28일 20시 09분


나는 한국인이지만 구름처럼 바람처럼 한반도 위를 표류하며 살지는 않고 한동네에 발붙이고 산다. 내가 사는 동네는 분당이라는 중소도시. 나는 내 국적지(國籍地) 한국을 사랑하는 것처럼 내 주거지 분당을 사랑한다.

서울에선 젊은이들의 찻집에서 푸대접받고 쫓겨나기도 한 노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찻집에 죽치고 앉아도 눈칫밥 먹지 않는 곳이 분당이다. ‘천당의 분당’이란 말은 그런 노인네들 입에서 나온 것 같다.

나는 중소도시에서 자란 시골뜨기다. 젊어서 유학 갔던 독일도 중소도시의 나라다. 당시 서독 수도였던 본을 위시해서 하이델베르크 프라이부르크 괴팅겐 등 대부분의 독일 대학도시는 인구 20만 내외의 중소도시다.

분당에서는 고속버스터미널, 음악회관 또는 대학병원 등 어디든 차로 15분이면 갈 수 있다. 그 중소도시형의 생활시간 단위가 내겐 썩 마음에 든다.

이렇게 고장 자랑을 했으니 이젠 좀 고장에 대한 험담을 해도 용서해 주실 줄 믿는다. 그건 내 고장만이 아니라 내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라의 큰일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잘 알지 못해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내 고장에 대해서는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좀 고언을 해도 괜찮을 성싶다.

홍등가 같은 전등은 싫다

나는 분당의 아파트 단지마다 너무 많은 분수들이 종일토록 물을 뿜고 있는 것이 싫다. 그리고 저녁이면 이곳 탄천 위의 몇 개 다리 난간을 울긋불긋 수놓는 네온전등 장식이 싫다. 나는 속으로 그 다리를 ‘홍등교(紅燈橋)’라 부른다. 아름다운 내 고장의 품격을 홍등가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데 대한 분한 마음에서….

제발 전력 낭비를 막기 위해서도 홍등교의 불이 꺼졌으면 싶고 그보다도 봄부터 가을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이 개나 날이 흐리나 물을 뿜어대는 분수를 좀 줄였으면 싶다.

여름만 되면 분당은 분수(分數)를 모르고 분수(噴水)를 뿜어대는 ‘분수당’이 된다. 아마 그 점에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분당의 대선배님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 앞 한강에는 세계 제일의 높이를 자랑하는 분수가 오늘도 물을 뿜고 있다. 나는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쯤 김포공항에 가는 길에 서울의 ‘세계 제1’을 순식간이나마 차창 밖으로 멀리 구경할 기회가 있다. 그러나 천만 서울 시민 가운데 그 분수를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건 어떻든 한강의 이 분수는 당대 한국의 됨됨이를 가장 과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라 여겨진다. 분수대를 아름답게 조형하는 예술적 고려는 완전 배제하고 오직 분수를 하늘 높이 쏘아 올리는 기네스북식의 제일주의에만 집착하는 한국, 애정엔 별 관심 없이 오직 성애에만 집착해서 정력제의 보양에 온갖 정성을 쏟고 있는 대한 남아처럼….

분수를 높이 쏘아 올리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름이다. 그건 국력이 아니다. 분수 높이 경쟁에 만일 중동의 어느 산유국이 나선다면 한강 분수의 두 배 높이로 쏘아 올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이다. 그런 어린애 같은 ‘세계 제1’을 위해 유가 130달러대의 오늘도 나랏돈을 퍼부어 하늘 높이 분수를 쏘아 올리는 수도 서울의 시정. 이 주변머리 없는 분수의 프로젝트는 또 다른 기억을 내게 불러일으킨다.

두 사람이 다 그 뒤 국무총리가 된 명망가가 서울시의 시장과 부시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온 시장 지시에 모든 아파트 베란다에 입주자가 설치한 바깥 창틀과 2중창을 철거하라는 것이 있었다. 1990년대의 일이다.

분에 넘치는 외형과시는 그만

유럽에서는 1970년대 초, 이미 제1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에너지 절약과 함께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에 주력했다. 그 대책의 하나로 추운 스칸디나비아의 주거 생활에서 배우자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모든 건물의 창틀을 2중창으로 개조하도록 했다. 그를 위해 형편이 어려운 가구에는 정부에서 보조금까지 지급해 줬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에선 민간이 자발적으로 베란다 창을 2중화한 것을 시 정부에서 오히려 철거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몇 차례나 유류파동을 겪으면서도 에너지 문제에 대한 당국의 경탄할 정도의 여유작작한 무신경과 무대책, 그것을 세계 제일의 높이로 과시하고 있는 것이 한강의 분수라면 그걸 분수 모르고 따라 하는 것이 분당의 분수라고나 할 것인지.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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