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세상/최종욱]씩씩한 동물, 나약해진 인간

  • 입력 2008년 3월 17일 02시 53분


대만원숭이 한 마리가 있다. 일반 가정에서 자라다 어떤 이유에선지 집에서 탈출해 119 구조대에 잡혀왔다. 오랫동안 인간과 더불어 산 때문인지 성격은 무척 얌전하다. 이빨을 드러내다가도 가까이 가면 고개를 푹 수그린다. 인간과 공존이 가능한 일본 대만 히말라야 돼지꼬리(일명 야자) 원숭이들이 대개 이런 성격이다.

이 대만원숭이에게는 지병이 있다. 잇몸에서 자꾸 이상한 조직들이 자라나 1년 정도면 윗잇몸 전체를 덮어 버린다. 그때마다 제거 수술을 해 줘야 한다. 일단 마취를 한 후 자라난 조직의 기단을 묶거나 잘라내는 방법으로 수술한다. 비교적 간단하고 결과도 좋다. 그러면 또 1년 동안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

이번에 조직검사를 해보니 ‘섬유치은종’으로 나왔다. 양성종양의 일종으로 개나 사람에게도 흔하다고 알려져 있다. 원인은 확실하지 않지만 사료 같은 너무 편식화된 식단에 기인하는 것 같다. 동물들에게선 다른 기관으로 전이되지도 않고 진단과 치료가 비교적 쉬우니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질환에 속하지만 사람의 경우엔 이야기가 아주 달라진다.

지금처럼 외관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입 안에서 무언가 자라고 일 년을 주기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라면 사람에겐 보통 심각한 질병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일종의 진행성 암이니 완치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평생 이 보기 싫은 질환을 가져갈 수도 있다는 건데 아마도 사회생활을 영위하기에 치명적인 단점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조금만 자라도 잘라내 버리는 것 또한 문제다. ‘암’이란 것은 얌전히 다스려야지 심하게 다뤘다간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이 원숭이의 경우도 혈관을 차단해 조직을 질식시켜 말라 떨어지도록 하는 방법과 바로 잘라내는 방법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첫 번째 방법은 2, 3일 정도의 시간은 요하지만 수술시 출혈이 없고 회복이 빠르며 시술자도 편하고 거의 부작용이 없다.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은 출혈이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깨끗하긴 하지만 환자가 무척 고통을 받아 자꾸 긁어댄다. 더구나 치명적인 약점은 재발기간이 오히려 더 빠르다는 데 있다. 이렇듯 심하게 건드리는 것은 오히려 암을 악화시킬 수 있다.

한 질병을 가지고도 동물과 사람의 관점이 이렇게 다르다. 한창 단체생활을 해야 하는 학생들에겐 육체적인 불편함보단 정신적으로 사람을 기피하게 하는 무서운 우울증을 불러 올 수 있는 것이 이런 하찮은(?) 질병이다.

대만원숭이는 잘라만 주면 정말 잘 먹고 잘 뛰어논다. 사람은 질병외적인 요인이 더 많으니 더 많은 약이 개발돼야 하고 무분별한 약 사용은 오히려 자연적인 질병 저항력을 현저히 약화시킨다. 예전엔 감기 정도는 우습게 여겼는데 이제는 감기가 돌았다 하면 대유행이 되고 앓는 정도도 심해졌다. 그만큼 개개인의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증거다.

흔히 의학 발달이 생명을 연장시키고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지만 개개인으로 보았을 때 수명은 예전과 크게 변한 게 없고 치료하기 힘든 신종 질환은 늘어만 간다. 이런 추세라면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가 항상 질병을 달고 다닐 날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장애를 가진, 조금 불편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그들을 자꾸 비장애인과 분리시키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작은 장애를 가진 원숭이를 동료들이 사심 없이 대하듯 우리 사회도 불편한 사람들을 편안하게 보고 모든 사회시설을 그들에게 초점을 맞춰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잠재적인 ‘그들’이기 때문이다.

최종욱 광주 우치동물원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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