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강원택]입법보다 중요한 국회의원 책무

  • 입력 2008년 3월 5일 02시 58분


딱히 나아 보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17대 국회에서 입법 활동은 활성화됐다고 한다. 이전에 비해 의원 발의 법안의 양도 늘었고 가결 건수도 크게 증대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의원 입법 발의가 늘어난 것은 과거보다 전문성을 가진 인물들이 국회에 많이 진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더욱 중요한 이유는 시민단체가 의원 활동을 평가하기 위한 지표로 발의 법안의 수를 고려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시민단체의 이런 평가를 통해 우수 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하고 과거 낙천·낙선 운동 때처럼 무능 의원으로 찍히기도 한다. 의원들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발의 법안의 수는 늘었지만 질적 측면에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점도 적지 않다. 정부 제출 법안에 비해 전문성이 부족하거나 정책 결과에 대한 검토가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고, 때로는 의원이 대표하는 지역구나 사회 집단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반영하는 법안도 적지 않다. 통과되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면피용’으로 제출하거나 소속 정당과의 사전 협의 없이 당론과 다른 법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의원 발의 법안의 수가 늘어난 것은 긍정적 변화다. 문제는 이것만으로 우리 국회가 제 역할에 충실해져 간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사실 이보다 중요한 일은 국회가 대통령과 행정부를 ‘제대로’ 견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일이다. 민주화가 됐다고 해도 여전히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은 막강하다. 특히 인력이나 정보, 자원의 측면에서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불균형은 매우 크다.

이런 여건 하에서 국회의 행정부 견제는 그동안 정치적 수단에 의존해 온 경향이 있었다. 정책 심의에 집중하기보다 정치적 쟁점을 만들어 내고 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의 형성을 통해 대통령과 행정부를 압박하는 전략을 취해 왔던 것이다. 이 때문에 국회의 행정부 견제는 종종 정치적 갈등과 교착을 낳았고 국민의 눈에는 싸움만 하는 존재로 비판받아 왔다. 새 국회 구성을 앞두고 소리만 요란한 통제보다 실질적으로 행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는 국회가 정치적 견제에서 정책적 견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국회의 예산안 처리 권한을 강화하는 일이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유명한 문구처럼 세금 문제는 서구에서 의회 민주주의를 이끌어 낸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슈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국회의 예산 처리는 대체로 형식적이었다. 2008년 256조 원으로까지 예산 규모가 커졌지만 국회가 과거에 예산안 심의에 쓴 시간은 열흘 정도였다. 그나마도 예산안은 여야 간 정치적 갈등의 볼모로 잡혀 회기 내 처리하지 못하기도 했고, 작년처럼 대통령 선거로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의원들로서는 언론의 큰 주목을 받는 국정감사나 대정부 질문에 더 관심을 가졌다. 예산안 심의가 졸속, 부실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국회가 행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사후에 정치적 쟁점을 만들어 거칠게 대립하기보다 외국처럼 예산안의 편성 단계부터 개입함으로써 실제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차와 제도를 만들어 내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의원 입법에 열의를 보인 여러 의원의 노력은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제도로서 국회가 실질적으로 정책적 논의의 중심에 설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국민의 실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예산안에 관심을 갖는 일은 경제와 실용이 화두가 되고 있는 이 시대에 국회가 갖춰야 할 새로운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강원택 숭실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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