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노무현의 ‘패자부활전’

  • 입력 2008년 2월 21일 03시 00분


퇴임을 나흘 앞둔 노무현 대통령의 초상화가 청와대 본관 국무회의실(세종실)에 내걸렸다. 역대 대통령 초상화 대열의 맨 끝자리다. 노 대통령은 25일 이명박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뒤 곧바로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로 내려간다. 자신의 희망대로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는 첫 전직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국민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1980년대 이후 다섯 명의 전직 대통령과 함께 살게 된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신분에서 내려와 보통 사람으로 귀향하는 노 대통령을 보면서 전직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본다. 앞선 네 명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향후 발걸음에 더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가 있다. 62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퇴임하는 데다 언행이 특이하고 정력적이며, 현실정치에 미련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실패한 대통령’이란 낙인이 찍혀 거센 비판을 받아왔음에도 그는 여전히 국가와 국민의 소중한 공적(公的) 자산이다. 그에게서 희망을 아예 거둬들이기에는 아직 이르다. 잘했든 못했든 5년간의 국정운영 경험을 쌓았고 다양한 국내외 인적(人的) 네트워크와 나름대로의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다. 비록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실패했더라도 몇 배 더 길지도 모를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실패한 대통령이기 때문에 오히려 만회가 쉬울지도 모른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좋은 모델이다. 그는 1981년 노 대통령보다도 여섯 살이나 적은 56세에 퇴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실패한 미국 대통령’에서 ‘가장 성공한 전직 대통령’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퇴임 후에 흘린 남다른 땀 덕분이다.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때론 국제분쟁의 해결사로, 때론 작업복 차림의 목수로 봉사활동에 헌신했다. 빈민들의 집 지어주기 운동인 ‘해비탯’은 그만의 세계적 브랜드가 됐다.

2002년 노벨 평화상은 미국의 힘으로 받은 게 아니다. 최근엔 손수 만든 목제 가구를 팔아 1000만 달러가 넘는 봉사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패자부활전 승리는 어린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줘 “아빠, 난 커서 전직 대통령이 될래요”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겼을 정도다.

그제 시민단체 ‘희망제작소’가 마련한 ‘또 하나의 소중한 자산, 퇴임 대통령’이란 토론회는 낙향하는 노 대통령에게 귀중한 시사점을 주었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전직 대통령은 사인(私人)이되 상징성과 역할이 있다”면서 “무엇보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었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주문했다. 2003년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의 짧은 퇴임사도 소개됐다. “제가 실망시킨 국민, 저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았던 국민, 그리고 저를 미워했던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용서하십시오.”

노 대통령은 퇴임 후 매월 1500만 원의 생활비와 신변경호 외에 비서관 3명을 국가에서 지원받는다. 이런 예우를 즐기며 현실정치에 분란을 일으키는 데만 시간을 쓴다면 그의 패자부활전은 현직 때보다 더 혹독한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 총 495억 원을 들여 가꾸는 봉하타운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도 하다. 어떤 전직 대통령의 모델을 만들어 갈지 국민의 눈이 쏠려 있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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